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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초상, 1986

YUN HYONG-KEUN

윤형근

1928 – 2007

​

작업실에서의 생각

​1976

윤형근, 1976

작업실에서의 생각

계곡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누워 있었다. 나무는 뿌리부터 썩어 흙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무의 빛깔은 어느새 흙의 빛깔로 변해 있었다. 지금쯤은 아마 비바람에 닳아 옛 모습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경이와 섭리가 얼마나 큰지 일깨워 준 그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자연의 신비, 자연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엄청나고 압도적인지를 느꼈다. 그 생생한 모습은 지금도 마음에 새겨진 채 나를 떠나지 않는다.

 

흙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나도, 내 그림도 때가 되면 결국 먼지가 되리라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에 목숨이 붙어 있는 한정된 시간 동안 나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하루 기록을 남기는 것, 내 삶이라는 불꽃이 타고 지나간 흔적이자 증거를 남기는 것뿐이다.

 

자연은 어떻게 보아도 언제나 꾸밈없고 신선하며 아름답다. 내 작업, 내 그림이 그 꾸밈없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담아낼 수 있을까. 꽤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담아내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자연처럼 아무리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가 그림에서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캔버스는 지금도 예부터 익숙한 재료인 무명이나 삼베로 만든다. 언제 어떻게 보아도 캔버스에서는 어떤 따뜻함과 친근함이 느껴진다. 그 느낌은 천연 섬유가 지닌 꾸밈없고 신선한 아름다움에서 온다. 나는 천연 섬유에서 우러나는 그 소박함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그 아름다운 캔버스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연을 망가뜨리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손이 지나간 곳마다 자연은 일그러졌다.

 

가만히 앉아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잠깐 그리다가 무언가에서 달아나듯 작업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지금 이 순간을 지워 버리려는 마음도 얼마간 있다. 그러다 얼마 뒤 돌아와 새로운 눈으로 다시 그린다. 이 과정을 거듭하고 또 거듭한다. 마음에 들 때까지 작업을 이어 간다. 때로는 몇 해 전에 그린 그림을 과감히 망가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 그림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거침없는 기운으로 그린 그림이나 오히려 망가뜨린 그림에서 더 큰 힘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림이란 무엇인가.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잘 모른다. 그림은 생명이 타고 남은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아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을 드러내려 애쓸수록 자아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표현은 꾸며진 것이 된다. 그러니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디서 그만 그려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막막함 한가운데서 나는 그저 그린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면서도 끝없이 나를 그리게 하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을 뿐이다.

작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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