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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Terre d’Avenir

Une Terre d’Avenir

마라 호버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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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파리에] 간 것은 꼭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서도,

경력을 쌓을 전시 기회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니까, 그저 그곳의 사계절을 겪어 보고 싶었다.

윤형근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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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윤형근과 진행한 구술 채록에서 가져온 위의 인용문은, 작가가 1980년 12월 작업실과 가족을 서울에서 파리로 옮긴 이유의 일부만을 말해 준다. 파리는 예술과 계절의 다른 맥락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풍부한 직업적, 개인적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정치적 격동으로부터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1928년 충청북도 청원군(현 청주시)에서 태어난 윤형근은 일제 강점기에 성장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해방된 조국이 둘로 나뉘는 것을 보았다. 한국전쟁 전후의 격동기에 윤형근은 미술학교에 다녔고, 미술 교사로 일했으며, 국내외에서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형성기는 트라우마로 얼룩진 시기이기도 했다. 마흔다섯 살이 될 무렵 윤형근은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총살대 앞에 세워진 적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한국이 폭력에 휩싸였을 때, 쉰두 살의 윤형근은 고국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1970년대에 이미 파리에 머문 적이 있던 그는 1980년 아내와 십 대 아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이주하기로 했다.[ii] 윤형근이 파리에서 살고, 작업하고, 작품을 전시하며 보낸 2년은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화가로서 그의 자기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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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이 처음 파리를 본 것은 1975년이었고, 곧 1978년과 1979년에 다시 찾았다. 이 초기 여행 동안 그는 김창열, 이우환, 정상화, 김기린, 박서보, 심문섭 등 동료 작가들과 시간을 보냈는데, 이들 대부분은 1960년대에 한국을 떠난 이들이었다. 이 체류 기간의 편지와 일기에서 윤형근은 친구들의 집과 한식당에서 열린 저녁 모임, 작업실 방문,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 관람을 묘사한다. 첫 여행에서 윤형근은 루브르와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의 이름난 소장품을 보았다. 불과 3년 뒤인 1978년, 윤형근은 그랑 팔레에서 열린 《Second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d’Art Contemporain》 전시의 한국 섹션 《Peinture Coréenne Contemporaine》에 회화 두 점을 출품하며 파리의 웅장한 무대에서 자신의 작업을 선보였다. 프랑스 수도에서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 순간이었다. 한국 정부가 일부 비용을 지원한 이 전시는 “세계 무대에 한국 미술의 새로운 전통을 재정립”하고자 했으며,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 단색화(한국 모노크롬)와 연관된 다른 작가들과 함께 윤형근의 작업을 소개했다.[iii] 단색화라는 이름표에 담긴 민족주의적, 양식적 함의에 일부 유보적인 입장이었음에도, 윤형근은 이 주목받는 국제전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일기에 이 전시를 돌아보며 이렇게 썼다. “한국 그림이 제일 낫다. 모두 크고 시원하다. 창열이는 파리 사람들이 한국 작품의 수준에 놀랄 것이라고 했다.”[iv]

 

1978년과 1979년 윤형근은 장모 김향안과 함께 파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김향안은 이른바 한국 추상미술의 대부인 남편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 설립한 환기재단의 일로 그곳에 와 있었다.[v] 윤형근은 194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자신의 스승이었고 1960년 장인이 된 김환기와 가까웠다. 김환기 자신도 1950년대에 한동안 프랑스 수도에서 살며 작업했는데, 이는 그가 서양과 한국의 회화 양식을 융합한 결정적인 시기였다. 스승이 파리에서 겪은 변화의 경험에 영감을 받아, 윤형근은 약 30년 뒤 자신에게도 그런 경험을 구했다. 1980년 이주하면서 윤형근은 김환기가 사용을 권했던 한국의 전통 바탕재인 한지를 대량으로 가져갔다.[vi] 스승처럼 윤형근도 한지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번짐을 즐겼는데, 그는 이 회화적 효과를 “바위에 낀 이끼”에 비유했다.[vii] 한지가 윤형근의 작업을 한국 문화와 미술사에 뿌리내리게 했다면, 그의 작업 방식과 시각 어휘의 어떤 측면들은 프랑스의 동시대 작가들과 공명한다. 1980년대에 다니엘 뷔랭과 미셸 파르망티에 같은 프랑스 작가들 역시 반복적인 제스처로 캔버스와 다른 바탕 위에 검정이나 회색 띠를 만들고 있었다. 뚜렷한 비교는 아니지만, 윤형근과 이 화가들 사이에는 개념적 친연성이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 올리비에 모세, 니엘 토로니와 함께 파리에서 BMPT 그룹을 결성하며, 체계적이고 거의 기계적인 물감 칠하기를 통해 지나치게 신화화된 ‘작가의 손길’을 회화에서 걷어 내고자 했다. 윤형근 역시 재료에 대한 작가적 통제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자신의 역할을 물감, 붓, 바탕, 시간과 협업하는 쪽에 더 가깝게 보았다. 윤형근의 회화에서 붓 자국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데, 이 핵심적인 특징 때문에 이우환은 그의 그림을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고 불렀다.[viii] 이우환의 이 표현은 뷔랭과 파르망티에의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특히 세 사람 모두 작가의 손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관심을 공유했음에도 부인할 수 없는 고유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유럽 작가들의 이성적이고 질서 정연한 ‘그리지 않은 그림’과 달리, 특히 한지 위에 겹겹이 칠한 윤형근의 선적인 물감은 분명히 유기적인 형태를 낳으며, 그것은 나무 줄기, 바위, 흙, 혹은 물을 번갈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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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초기 파리 여행 때의 편지와 일기를 보면, 프랑스 수도의 미술계나 계절이 모두 그의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날씨에 대해 자주 언급했는데, 1975년 3월 8일에는 “파리는 매일 흐리다”고 썼다.[ix] 며칠 뒤 이우환과 함께 갤러리들을 둘러본 윤형근은 낙담을 드러내며 이렇게 적었다. “현대미술에 회의를 느꼈다. 미술은 죽었는가?”[x] 아마도 그는 세잔이나 세르주 폴리아코프의 그림과 더 닮은 작품들로 가득한 갤러리를 기대했던 것 같다. 훗날 그는 2000년 서울 경복궁 내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에서 열린 프랑스 근대 화가 순회전에서 이들의 그림을 보고 “아주 우아하게 단순하고 겸손하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며 감탄했다.[xi] 1975년 윤형근이 카미유 코로를 비롯한 19세기의 많은 풍경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마을과 숲을 직접 보기 위해 ‘관광버스’를 타고 바르비종에 간 것도 분명 프랑스 회화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xii] 그때 윤형근은 코로의 유산이 자신의 경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5년 뒤인 1980년 말 다시 파리로 돌아온 윤형근은, 한때 이름의 주인인 코로의 작업실이 있던 파리 14구의 건물 빌라 코로에서 일하는 화가, 작가, 사진가, 판화가, 조각가, 목수들로 이루어진 역동적인 국제 공동체에 합류했다.[xiii] 1980년 윤형근이 자리 잡은 몽파르나스 지역은 코로 이후 여러 세대의 국제적인 화가들에게 비옥한 토양이었다. 몽파르나스에 모여든 쟁쟁한 작가들 가운데에는 20세기 에콜 드 파리의 샤임 수틴, 마르크 샤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있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조안 미첼, 래리 리버스, 장 팅겔리, 니키 드 생팔, 이브 클랭 같은 이들이 전설적인 센강 좌안의 예술가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예술 양식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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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과 기법은 윤형근과 전혀 다르지만, 미첼은 풍경과 깊은 관계를 맺고 추상을 통해 자연을 불러낸 또 다른 작가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예다. 이 미국 화가는 이미 오래전에 몽파르나스를 떠나 프랑스 시골로 이주했지만, 1980년대에 파리에서 활발히 전시하고 있었다. 갤러리를 자주 다녔던 윤형근은 갤러리 장 푸르니에에서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미첼의 대형 회화를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그곳에서 그는 ‘플리아주’로 알려진, 안료와 바탕을 접어 실험한 시몽 앙타이의 ‘그리지 않은 그림’도 즐겼을지 모른다). 1981–1982년에는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뷔랭의 개인전 《Murs》에서 그의 체계적인 줄무늬 구성을 볼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의 안식처이자 인큐베이터라는 파리의 역사적, 동시대적 명성에 깊은 영감을 받은 윤형근은 2년의 체류 기간 동안 왕성하게 작업했고, 빌라 코로의 연례 전시와 정기 오픈 스튜디오에서 신작을 선보였다. 이 시기 리넨, 마포, 한지 위의 작업은 그가 1970년대 한국에서 확립한 고유한 양식을 따르면서도, 그것이 만들어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깊이 속해 있고 그것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말로 하면 이렇다. “그림은 내 삶의 이야기다. 더 짧게 설명하자면 ‘오늘’이라고 하겠다. 혹은 ‘지금’. 혹은 ‘이 순간’.”[xiv] 도시의 날씨에서부터 유서 깊은 역사와 풍부한 문화에 이르기까지, 파리에서 보낸 시간의 모든 순간과 모든 면이 윤형근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일기와 편지와 더불어, 윤형근의 그림은 그의 일상(vie quotidienne)의 기록이자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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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0년대 초 윤형근의 회화를 논하려면 그가 1973년부터 만들어 온 작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그해 그는 표면상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윤형근은 화풍을 급격히 바꾸었다. 이전에는 다양한 색을 썼지만, 그는 팔레트를 엄버와 청색 단 두 가지로 줄이고 이를 테레빈유와 린시드유로 아주 묽게 풀었다. 넓은 붓으로 묽은 물감을 겹겹이 칠하며, 윤형근은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의 건조 시간이 필요한 명상적이고 체계적이며 시간이 많이 드는 과정을 따라 화면을 수직의 사각형 형태로 채웠다. 1973년 이후 윤형근 작업의 놀라운 균일성 때문에 구성이나 양식, 기법에서의 작은 변화조차 두드러진다. 작가가 파리에 도착하기 직전인 1980년에 그린 몇 점의 회화가 바로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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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김인혜에 따르면, 군부 통치에 맞선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된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아직 한국에 있던 윤형근은 “마당으로 뛰쳐나가 커다란 천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굵고 검은 기둥을 그리기 시작했다.”[xv] 김인혜는 이 기울어진 형태가, 작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뒤 집요하게 그려 온 곧게 선 기둥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기둥은 비평가들에 의해 감옥의 창살에 비유되기도 했고, 윤형근 자신은 그 수직성 때문에, 그리고 엄버는 땅, 청색은 하늘을 연상시키는 색채 때문에 하늘과 땅 사이의 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답지 않은 극단적인 사선과 눈물처럼 흘러내린 자국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 그의 말을 빌리면 “군인이 민간인을 찌르고 죽이는… 죄”에 대한 윤형근의 본능적인 반응을 전한다.[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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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광주의 참상으로부터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제공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윤형근은 여전히 청색과 엄버라는 고유한 팔레트를 쓰면서 더 안정되고 균형 잡힌 구성으로 돌아갔다. 1981년에도 살짝 기울어진 사각형이 있는 작품(특히 한지에 유채로 그린 〈Burnt Umber & Ultramarine〉)을 몇 점 만들기는 했지만, 1981년 빌라 코로의 작업실을 찍은 사진은 파리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작가가 그의 분신과도 같은 그림들을 통해 평정을 되찾았음을 보여 준다. 이 사진 속 작업실 바닥에 펼쳐진 제작 중인 그림들 어디에도 그가 지난해 그린 위태롭게 쓰러지는 기둥과 비슷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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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의 회화들은 지난해 한국에서 그린 것들보다 더 밀도 높게 칠해졌고 구성도 더 장중하다. 빌라 코로에서 윤형근은 거의 전체가 짙은 갈색으로 덮이고 두세 개의 굵고 곧은 기둥을 중심으로 구성된 〈Umber-Blue〉 연작을 다수 제작했다. 이 작품들에는 묽은 물감이 너무나 여러 겹 쌓여 어떤 부분은 거의 검게 보이고, 기둥들은 서로 깊이 번져 들어가 그 사이의 희미한 밝은 틈만이 처음에는 분명히 별개의 형태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어두운 사각형들을 가르는 밝은 부분은 그림 속에 공간감을 만들 뿐 아니라, 구성 전체의 극적인 수직적 추진력을 강조한다. 다시 일어선 1981년의 기둥들은 바로 그 가까움을 통해 힘을, 나아가 위로 솟구치는 기세까지 얻는 듯 보인다. 어두운 형태들 사이로 배어드는 기름은 완전한 융합 직전의 긴장을 시각화한다. 의식적이었든 아니든, 윤형근은 여기서 그의 조국을 비극적으로 비껴간 하나 됨의 감각을 불러낸다.

1981년의 〈Umber-Blue〉 회화들은 작가를 단색화라는 우산 아래 포함시키는 근거가 되며, 마크 로스코나 애드 라인하르트 같은 미국 추상 작가들의 작업과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윤형근은 그런 연관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을 “모노크롬도 미니멀리즘도 아니”라고 말했다.[xvii]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흙빛과 한국의 전통 서예의 맥락에서 보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검게 보이지만 흙과 물의 색이 섞인 것이다. 썩은 먹처럼 쓴 색이다.”[xviii] 검정에 대한 이런 섬세한 이해에 관해 윤형근은 파리에서 공감과 새로운 연상을 발견했다. 빌라 코로에서 한 프랑스 컬렉터의 작업실 방문을 받으며 그는 본질적인 문화적 차이를 깨달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검정조차 아름답다고 여기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 색을 불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xix] 윤형근의 이 관찰은 이 낯선 맥락에서 그림을 만들고 선보이는 일이 어떻게 새로운 연결과 관점과 함의를 열어 주었는지를 보여 준다. 한국에서는 그의 친구인 조각가 최종태가 1996년에 썼듯 “윤형근 그림의 검은색에는 삶의 고통과 고독과 허무가 배어 있다.”[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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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화적 차이의 인식은 시대정신 속에 있었다. 윤형근이 파리로 이주하기 직전인 1979년, 퐁피두 센터는 피에르 술라주의 대표적인 온통 검은 회화를 다룬 대규모 전시 《L’expérience du noir》를 열었다. 두 작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윤형근과 술라주는 존재의 상태로서 그림의 검정과 맺는 관계를 공유했다. 술라주는 (그 역시 자신의 어두운 팔레트를 전쟁의 트라우마, 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의 비시 점령과 연결 지었다) 빛이 두텁게 쌓아 올린 검은 회화의 표면에서 반사되다가 마침내 그것을 해체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우트르누아르(outrenoir, 검정 너머)’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바탕칠하지 않은 표면에 묽은 물감을 겹겹이 올리고 미묘한 색조와 질감의 변화를 보여 주는 윤형근의 표면은 물질적으로 술라주의 질감 있는 회화와 정반대이지만, ‘검정 너머’에 있다는 것, 어둠보다 더 어둡게 느낀다는 개념은 분명히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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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넓은 유럽의 맥락에서, 가공하지 않은 날것의 재료에 대한 윤형근의 애착은 그를 아르테 포베라 운동과 연결한다. 1940년대 미술 학도 시절 윤형근은 재활용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목탄을 만들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 미군 기지에서 주운 맥주 캔에 넣고 왕겨와 함께 태운 것이다.[xxi] 유화 물감을 용제로 묽게 푸는 윤형근의 고유한 기법 역시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미술 재료를 아끼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틀에 씌우지 않은 그림들이 바닥에 펼쳐진 빌라 코로 작업실 사진은 여러 그림을 동시에 작업하는 윤형근의 과정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부리가 버려진 마대 자루를 꿰매 만든 〈Sacchi〉를 떠올리게 한다. 부리의 패치워크에 비하면 틀에 씌운 윤형근의 완성작은 깨끗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각각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작가들이 겪은 트라우마와 결핍의 경험에서 비롯된 공통된 거칠음과 겸손함이 있다. 부리는 〈Sacchi〉를 만드는 기법을 제2차 세계대전 중 위생병으로 복무하며 부상병의 상처를 꿰매던 일과 연결했다. 윤형근은 그림을 물리적으로 꿰매지는 않지만, (검정을 고통과 동일시한) 최종태 역시 윤형근의 작업에서 상징적인 찔림을 발견하고 이렇게 썼다. “그의 캔버스는 마치 바늘로 찌른 것처럼 어쩐지 고통의 소리를 내는 것 같다.”[xxii] 육체적 고통과의 친밀함, 그리고 부서진 몸을 되살리고 찢긴 땅을 수선하려는 바람은 ‘가난한’ 재료의 사용을 훨씬 넘어 부리와 윤형근을 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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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은 재료를 알뜰하게 썼을 뿐 아니라, 부리나 조반니 안셀모(흙과 울트라마린 물감을 쓴 그의 설치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윤형근의 팔레트와 공명한다) 같은 아르테 포베라 작가들처럼 재료의 날것 그대로의 물리적 특성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했다. 캔버스에 바탕칠을 할 여유가 있을 때에도 윤형근은 “천연 섬유의 절대적인 소박함과 신선함”을 존중하기로 했다.[xxiii] 처리하지 않은 바탕은 물감과 면, 리넨, 마, 한지의 섬유 사이에 신선하고 즉흥적인 상호작용을 이끌어 냈다. 바탕 위에 그리는 위계적인 방식 대신 재료들을 서로에게 스며들게 함으로써, 윤형근은 이미지가 자연스럽고 총체적인 방식으로 재료가 어우러진 부산물에 불과한 작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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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작업에서 자연의 중요성은 한지 작업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전통 서예 종이인 한지의 내구성, 특히 습기를 흡수하고 내보내는 성질은 겹겹이 칠하는 윤형근의 묽은 유채에 이상적인 짝이었다. 파리에서 윤형근은 이 작은 크기의 종이 작업을 아파트에서 하고, 작업실은 더 무거운 바탕의 대형 작업을 위해 비워 두었다.[xxiv] 캔버스나 리넨, 마보다도 한지는 묽은 물감을 겹쳐 칠하는 윤형근의 기법에 작용하는 개념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을 더 잘 드러낸다. 다른 바탕에서처럼 짙은 갈색으로 불투명해지는 대신, 여기서 엄버와 청색은 각자의 색조와 투명함을 더 많이 간직한다. 팔레트는 엄밀히 말해 다른 바탕에 쓴 것과 같은 두 가지 물감으로 제한되지만, 종이 작업은 훨씬 더 다채로워 보인다. 슬레이트 블루와 은회색에서 연어빛 분홍과 흐린 주황에 이르기까지 미묘하고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겹쳐진 청색과 엄버의 붓질이 섞여 무지개 같은 흙빛을 만든다. 윤형근은 캔버스 작업의 어두운 색을 “썩은” 색이라 했지만, 사각형 형태를 둘러싼 안료의 후광과 함께 한지 위에서 같은 물감이 빚어내는 상호작용은 무르익음과 피어남, 혹은 부패까지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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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은 추상적이고 여전히 대체로 수직의 사각형을 바탕으로 하지만, 캔버스나 마포 위의 회화보다 더 부드럽고 유기적인 성질을 지닌다. 윤형근이 1981년에 그린 한지 작업에서 흙빛의 색 조합, 종이의 거친 결, 번지는 물감의 흐릿함은 강바닥과 갈대와 그루터기를 번갈아 떠올리게 한다. 1977년 일기에서 윤형근은 자연에 대한 애착을 색과 촉감과 형태의 측면에서 설명했는데, 이 모든 것이 이 종이 작업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자연의 색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게 좋다. 세월에 닳은 나무의 색, 그게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닌가. 질감이 흙 같을 때, 혹은 구운 토기나 벽돌의 색이 흙빛일 때 그 색은 순수하다. 바위가 부서져 가는 것 같은 풍화의 흔적, 그런 거칠음과 소박함이 좋다.[xxv]

 

캔버스에서보다 더, 한지 위에 생긴 얼룩, 튄 자국, 붓털의 흔적, 번짐 같은 사랑스러운 불완전함들은 윤형근이 엄격하고 체계적인 과정과 우연의 예측할 수 없는 즉흥성 사이에서 찾아낸 조화를 함께 드러낸다.

 

파리 한복판에서 살며 작업하면서도 자연은 윤형근의 생각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복잡한 질문을 던지던 윤형근은 이렇게 적었다. “한국적인 것… 아무리 막연하게 말한다 해도 한 문장으로 하면 흙과 하늘과 바람이다.” 실제로 한지 작업은 특히 내밀하고 정서적이며 그리움을 자아낸다. 윤형근과 가족은 파리에 간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외국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xxvi] 정치나 문화, 역사에 뿌리를 두었다기보다, 윤형근과 그의 예술은 고국의 풍경과 굳게 이어져 있었다. 프랑스어에는 땅과의 이런 불가분의 관계를 일컫는 ‘테루아(terroir)’라는 말이 있으니, 윤형근이 파리에서 작업하며 이 개념을 그토록 절절하게 표현했다는 것은 잘 어울리는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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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윤형근, 김이순 인터뷰,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6권, 2006 삼성문화재단 구술채록 프로젝트 (서울: 리움 한국미술기록보존소, 2007). 조나영 번역 (미출간 원고, 2021), PDF.

[ii] 김현숙, 「윤형근: 천지문(天地門)」, 『윤형근』 전시 도록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2019), 142쪽.

[iii] 이일, 「Peinture Coréenne Contemporaine」, 『Second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d’Art Contemporain: Corée 9 peintres』 (파리: Presses artistiques, 1978), 쪽수 없음.

[iv] 윤형근, 1978년 12월 6일 일기, 『윤형근을 기억하며』. 제이크 레빈, 양수현 번역 (미출간 원고, 2022), PDF.

[v] 윤형근, 1978년 12월 5일 일기, 『윤형근을 기억하며』.

[v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vi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viii] 이우환, 「尹亨根の仕事」, 『윤형근』 전시 도록 (도쿄: 무라마쓰 화랑, 1976), 쪽수 없음.

[ix] 윤형근, 1975년 3월 8일 일기, 『윤형근을 기억하며』.

[x] 윤형근, 1975년 3월 11일 일기, 『윤형근을 기억하며』.

[x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xii] 윤형근, 1975년 3월 16일 일기, 『윤형근을 기억하며』.

[xiii] 「약력」, 『윤형근』, 175쪽.

[xiv] 윤형근, 1978년 일기(날짜 미상), 『윤형근을 기억하며』.

[xv] 김인혜, 「윤형근: 영원한 노경(老境)의 세계」, 『윤형근』, 21쪽.

[xv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xvi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xviii] 윤형근, 배리 슈왑스키, “It’s Time to Stop Ignoring South Korean Abstract Art,” 『The Nation』, 2015년 12월 17일에서 재인용. 온라인 열람.

[xix]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xx] 김현숙, 「천지문(天地門)」, 139쪽.

[xx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xxii] 최종태, 김현숙, 「천지문(天地門)」, 139쪽에서 재인용.

[xxiii] 윤형근, 「작업실에서의 생각」 [1976], 『Yun Hyong-keun: Selected Works 1972–2007』 (서울: PKM 갤러리, 2015), 10쪽.

[xiv]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xxv] 윤형근, 1977년 일기(날짜 미상), 『윤형근을 기억하며』.

[xxvi] 윤형근, 『한국미술기록보존소 구술사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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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즈워너 북스 발행 전시 도록 『Yun Hyong-k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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