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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의 대화:
도널드 저드와 윤형근의
예술, 전쟁, 그리고 국제 정치

리즈 박, 2022

 

 

 

 

텍사스주 마파의 치나티 재단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작고한 한국 작가 윤형근의 1993년 회화 세 점이 도널드 저드의 1978년 합판 무제 작품들 가까이에 걸려 있다. 두 작품군이 태어난 시점과 장소는 15년, 그리고 약 1만 1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 이 조합을 1991년 저드가 서울 인공갤러리의 초청으로 전시와 강연을 하면서 처음 만난 두 작가가 사후에 나누는 교류로 생각해 보자.

 

저드에게 한국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전 미 육군 공병대 소속으로 한국에 주둔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열여덟 살의 저드는 서울 근교 김포의 미군 공군기지에서 건설 현장 감독으로 일했다. 당시 한국은 35년간의 가혹한 일제 강점기에서 막 벗어났지만, 북쪽은 소련과 중국, 남쪽은 영국과 미국의 신탁 통치 아래 둘로 나뉜 상태였다. 저드는 세계 냉전 정치의 전장이 될 위기에 놓인 나라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흥미롭고 즐거웠다”고 회고했다.[i] 이 시기에 그는 산업 건설과 재료의 기초를 익혔고, 이는 훗날 미니멀리즘을 이끈 작가로서 그의 작업을 규정하게 된다.

 

1947년 저드가 명예 제대 후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윤형근은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윤형근은 미국 주도의 국립대학 통합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에 참여했고, 그 결과 제적당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정치적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을 받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을 명분으로 이 젊은 작가를 포함해 수십만 명을 검거했다. 한국 역사상 국가가 주도한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알려진 보도연맹 사건으로 약 6만 명에서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윤형근은 총살 직전 간신히 탈출해 기적적으로 이 운명을 피했다. 그 뒤로 자신의 삶을 덤으로 얻은 시간이라 여긴 윤형근은 이후 한반도를 휩쓴 정치적 격동 속에서도 예술의 길을 이어 갔다.

 

한국의 결정적인 전쟁 시기에 저드와 윤형근이 겪은 서로 다른 경험은, 두 사람이 각자 예술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 가는 동안 그들의 작업 전반에 울려 퍼졌다. 저드에게 조립식 건물의 건설을 감독한 경험은 산업 재료를 다루는 일뿐 아니라, 훗날 미술과 건축에 관한 잦은 글쓰기에서 명확히 표현하게 될 공간적 실천의 토대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문화적 관점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저드의 인식은 이 해외 체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미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거부는 「제국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1975)와 「미술과 국제주의」(1992) 같은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에 발끈하면서도, 그는 자국의 경제적 제국주의로 혜택을 입은 백인 미국인 세대의 일원이었다.[ii]

 

미 제국주의는 윤형근의 삶에 훨씬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권위주의 정부가 잇따라 들어선 전쟁의 상흔 속에서 그가 지킨 정치적 신념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 갈 수 없게 만들었고, 그는 훗날 장인이 되는 화가 김환기가 가르치던 홍익대학교로 옮겨야 했다. 시련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군 지도자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적인 유신헌법을 공포한 이듬해인 1973년, 그는 허술한 혐의로 네 번째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유신헌법은 박정희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고 임기 제한을 없앤 반면, 국민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심하게 제약했다. 석방된 뒤 마흔다섯의 윤형근은 밝은 색과 반복적인 제스처를 쓰던 이전의 조형 실험을 버렸다.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사회 속에서 윤형근은 단호하게 새로운 작업 방식을 추구했고 자신을 대표하는 양식을 완성했다. 그는 묽은 엄버와 청색 물감을 바탕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겹겹이 스며들게 해 깊고 빛나는 검은 기둥을 만들었다. 동양의 서예와 마크 로스코의 초월적 회화 모두에 비견되는 윤형근의 원숙한 양식은, 국민의 창작 표현을 적극적이고 폭력적으로 억누르며 급속히 근대화하던 나라에서 수십 년에 걸쳐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간 결과였다.

 

처음에는 화가로 훈련받았지만 1963년 무렵 완전히 입체 작업으로 관심을 옮긴 저드와 달리, 윤형근은 평생 캔버스에 유채라는 매체를 고수했다. 저드가 다양한 산업 재료를 다루는 제작자들과 협업하며 형태의 정밀함과 단순함을 동시에 이루려 했다면, 윤형근의 실험은 물감과 캔버스의 본성, 그리고 거대한 기둥 같은 획의 구성을 더 깊이 이해하는 쪽으로 파고들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 한국 언론에 대한 검열이 극심했기에, 윤형근에게는 글 쓰는 이로서 저드가 가졌던 것 같은 발표 지면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기에 생각을 기록했다. 1977년의 한 일기에서 윤형근은 자신의 그림을 ‘천지문(天地門)’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대략 ‘하늘과 땅 사이의 문’이라는 뜻이다. 그는 청색이 하늘(천)을, 엄버가 땅(지)을 나타내며, 기둥은 문(문)을 구획한다고 설명했다. 반복되는 획 하나하나가 문의 가장자리를 규정하면서, 윤형근은 결국 역으로 그 가운데 공간을 그려 내고 있었다. 땅과 하늘 사이에 놓인 것뿐 아니라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사이에 있을지 모를 것까지 불러내면서.

 

비움에 관한 윤형근의 회화 언어는 공간 속 부피를 규정하는 저드의 방식과 운을 맞추지만, 두 작가가 대칭, 색, 빛, 그리고 다른 예술적 관심사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던 맥락은 미국과 한국의 얽히고설킨 정치사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달랐다. 저드와 윤형근의 작품이 같은 장소와 시간, 곧 2022년 텍사스주 마파에 함께 걸려 있다는 사실은 형식적 친연성을 넘어 두 작가의 관계에 대해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저드가 치나티 재단에 품었던 비전이, 자신과 예술적 대화 상대들의 작품을 그가 가장 적절하다고 여긴 환경 속에 보존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91년 서울에서 두 작가가 만나기 전부터 저드의 명성은 알려져 있었다. 윤형근의 장인 김환기가 1963년부터 197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에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김환기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윤형근은 1970년대 저드의 높아지는 위상, 그리고 저드가 1964년 같은 제목의 글에서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이라 부른 미국의 새로운 미술의 등장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저드는 “장소가 공통된 특징을 만든다는 것은 숱한 미술사적 상투어 가운데 하나”라고 썼을지 모르지만, 「특수한 사물」에서 저드가 묘사한 예술적 실험이 1960년대 대체로 실패하던 농업 경제의 물질적 빈곤 속에서, 그리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 정부의 검열 아래에서 한국에 뿌리내리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iii]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에서 살아남고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작업을 성숙시킨 윤형근과 그의 세대 많은 추상화가들은, 나중에 소급하여 단색화, 곧 모노크롬 회화와 동일시되었다. 저드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미니멀리즘이라는 꼬리표를 거부했듯, 단색화라는 용어 역시 이 느슨한 묶음에 속하게 된 작가들의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가린다. 그럼에도 이 용어는 한국의 초기 아방가르드 화가들이 국제적 기획전, 시장의 투기, 학술 연구의 대상이 점점 더 자주 되면서 그들을 가리키는 약칭이 되었다.

 

한국은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인 노태우 정부 아래 1980년대 후반의 정치 개혁을 거치며 비로소 명목 이상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세계에 선보인 돌파구로 환영받았고, 이는 지난 시절의 인권 유린과 상관없이 지금도 기념되고 있다. 1992년 1960년대 이후 첫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이 당선되면서 문화적, 경제적 낙관과 함께 국제 교류도 늘어났다. 단색화 작가들이 해외에서 활발히 전시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에서였다. 특히 윤형근은 1992년 테이트 리버풀의 단체전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국제 기획전에 참여했다. 저드가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것도 1990년대 초였다. 「미술과 국제주의」에서 저드는 한국의 전면적인 발전을 “부분적으로는 좋지만” “파괴적”이기도 하다고 돌아보며, 세계 곳곳에서 도시가 점점 획일화되고 고유한 문화가 납작해지는 것을 한탄한다.[iv] 그러나 평생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억압당해 온 작가들에게 국제주의는 자신의 예술적 목소리를 내세우고, 고립주의적이던 나라 밖의 작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열어 주었다.

 

1990년대 초 윤형근은 국내에서 영향력과 명성을 갖춘 중견 작가였다. 저드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 하던 친구이자 인공갤러리 대표 황현욱을 대신해, 윤형근은 저드가 전시한 적 있는 오사카의 갤러리 야마구치에 연락했다. 갤러리 야마구치의 소개로 황현욱은 저드의 방한을 성사시켰고, 1991년 한국에서 그의 첫 전시와 강연을 열었다. 미술사학자 강태희는 「Who’s Afraid of a Box?」라는 제목의 리뷰에서, 전시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의 저드 근작 몇 점만으로 구성되었으며, 저드가 미니멀리즘에 대해 이론을 펼치는 것을 듣고 싶어 강연에 온 이들이 주로 치나티 재단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실망했다고 적었다.[v] 그럼에도 강태희는 이 전시가 그의 작업을 엿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였다고 평가했고, 지면을 빌려 저드 작업의 미술사적 맥락을 짚고 미니멀리즘을 상세히 설명했다. 리뷰의 형식을 빌린 이 글은 한국 작가들 사이에서 점점 공통 어휘가 되어 가던 서구 미술 실천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었다. 해외 유학과 체류가 소수 부유층의 특권이던 지난 수십 년과 달리, 더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가까운 울타리를 넘어 예술적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환하게 웃는 저드와 윤형근의 사진 몇 장이 서울에서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진 일, 곧 1993년 저드의 101 스프링 스트리트에서 열린 윤형근의 뉴욕 첫 개인전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존경을 보여 준다. 윤형근은 같은 시기 필라델피아의 록스 갤러리에서도 작품을 선보였고, 이 전시는 치나티 재단으로 순회했다. 전시가 끝나자 윤형근은 현재 전시 중인 세 점의 회화를 재단에 기증했다. 저드는 1993년 암 진단을 받았고, 두 사람의 우정이 막 시작되던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윤형근은 둘 사이의 친연성과 차이를 홀로 풀어 나가야 했다. 두 작가 모두 구상과 재현에서 돌아서 추상을 탐구했지만, 저드의 날카로운 기하학과 기계적 정밀함은 묽게 푼 물감을 유동적으로 칠하는 윤형근의 성향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물려받은 재료와 형식을 밀어붙여 색과 빛, 그리고 예술과 세계 속 그 자리의 관계를 탐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두 작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작품만이 지난날의 실험과 만남을 가리키며 남은 지금, 그 사이의 공간에서 어떤 대화가 가능할까. 오늘날 미술 담론에서 형식주의와 추상이 차지하는 자리?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냉전과 한국의 열전이 남긴 유산? 국제 정치와 무관하지 않은, 다른 모더니즘에 대한 동시대 미술 시장의 욕망과 커져 가는 서구의 관심? 행성적 위기의 시대에 예술의 영감으로서의 자연? 한 층위에서 저드와 윤형근 작품의 조합은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두 개인이 교차하고 갈라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예술적 친연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읽히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또 다른 층위에서 그것은 두 사람 각자보다 더 큰 경제적, 정치적 힘에 관한 이야기이며, 어지러운 세계 정치와 경제가 예술적 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치나티 재단의 보호 아래 저드와 그의 친구들의 현대미술을 품고 있는 퇴역 군 막사에서, 윤형근의 회화는 그의 캔버스라는 공간뿐 아니라 천지문(天地門)이 암시하는 공간에도 주의 깊은 눈길을 청한다. 세계 열강의 각축 속 혼란 가운데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던 하늘과 탱크가 짓밟고 지나간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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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cal History: 1946 Western Union Telegram,” 저드 재단,

https://juddfoundation.org/research/local-history/local-history-1946-western-union-telegram/.

[ii] 도널드 저드, “Imperialism, Nationalism, and Regionalism,” 1975,

저드 재단.

[iii] 저드, “Imperialism, Nationalism, and Regionalism.”

[iv] 저드는 이렇게 썼다. “모든 것, 모든 곳, 1947년 [한국의] 평범한 모습, 한국의 전통과 사회 거의 전부가 이제 서울의 민속박물관 유리 너머에 있고 민속촌에 고립되어 있다. 물론 중요하고 아름답다. 이것은 45년 만의 완전한 역전이다. 동물들이 우리 밖에서 우리 안의 사람들을 구경한다는 농담처럼. 이는 매우 빠르며, 물론 부분적으로는 좋지만 매우 파괴적이다. 한국에서든 어디에서든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저드, “Art and Internationalism,” 1992, 저드 재단 참조.

[v] 강태희, “Who’s Afraid of a Box?,” 『월간미술』 (1991년 6월).

* 치나티 파운데이션 뉴스레터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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