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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성찰의 고고학

아제마 토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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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나는 그가 최근 몇 년간 제작한 작품을 몇 점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곁에 있는 그의 작품집을 들여다보면, 1974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이 완숙한 구성과 양식이 오늘날에도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양식을 끊임없이 바꾸거나 뜻밖의 변화를 꾀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채 자신의 풍부한 재능을 발휘해 왔다. 이는 그의 대담한 성품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캔버스 화면 전체가 내뿜는 비범한 힘에서 드러난다. 그 구성은 너무나 단순해서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온다. ‘엄버’, ‘엄버-블루’ 같은 제목은 단순하면서도 우의적인 기이함의 기미조차 분명히 비워 낸 고요를 표현한다. 대신 그것은 짙은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석순처럼 곧고 긴 몇 개의 막대 같은 나무 줄기를 표현한다. 이것이 그의 세계를 이루는 유일한 요소다.

 

곡물로 만든 묽은 아교를 써서 여러 번 칠한 아주 얇은 층과도 같은 그의 색은, 유화 물감이 주는 화려하고 끈적한 풍요로움의 인상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화면 전체가 짙은 고색(古色)에 잠긴 듯한 묵직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회화는 금박을 엷게 입힌 화선지 위에 먹으로 그린 추상이라는 인상을 준다. 갈색빛 엄버/블루의 안쪽을 감싸는 색과 상반되는 칠해진 색의 깊이가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끝이며, 윤형근이 그 제자일 수도 있었던 모리스 루이스와 마크 로스코의 작업, 곧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넘어서는 파노라마의 지평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캔버스 위에 펼쳐 놓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단순하고 중립적인 현존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시간과 역사의 존재가 있다. 다만 오늘날 말하듯 그 시간과 역사를 전통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섬세한 색이 있다. 전통이 없는 미국에서는 태어날 수 없고, 전통이 다른 일본에서는 발전할 수 없는 색이다.

 

문제는 색 그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기존의 색을 지워 나감으로써 결국 무리하다 싶을 만큼 단색으로 향하는 그 변함없는 경향에 있어, 작가가 본질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저절로 드러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는 점이다. 초기 작품에서 윤형근은 초록, 노랑, 파랑, 그리고 무엇보다 생생한 빨강을 썼다. 이 색들이 갑자기 그의 캔버스에서 사라진 것은 그것들이 색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두가 하나의 단색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단색은 결국 모든 색을 함축하며, 하나 속에 여럿을 드러내는 세련된 감수성을 만들어 낸다. 엄버/블루의 색은 캔버스에 펼쳐진 모든 물질 속으로 흘러드는 다채로운 액체다. 진정한 풍요는 단색에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같은 한국의 그릇들이 그의 원천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삶의 다양한 색을 겪었고, 그 가운데 선과 악을 녹여 내는 용광로 같은 하나의 색을 골라냈다.

 

윤형근의 색은 이 전통 때문에 말해지지 않는 이 전통의 색과 맺는 단순한 연결 고리다. 그러나 전통은 결코 주제가 되지 않으며, 스스로의 빛을 지닌 색이 없는 허무가 되지도 않는다. 결국 전통은 그 이름에 값한다. 지금 여기에서 전통은 우리를 온전히 감싸고 있으며,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모체이기에 매번 새로운 발견이 된다. 더구나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자연에서 온다. 작가의 붓끝에서 태어나는 빛은 본래의 색이다. 자연과 그 사계 속에서 깊이 침잠한 색이며, 옛사람들의 감수성으로, 그리고 무(無)에서 나온 무의 변용을 비추는 빛으로 돌아갈 때 다시 발견되는 색이다. 바로 이 순간에 전통이라는 말은 마침내 생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자연의 발견으로 향하는 만큼 중요한 것은, 윤형근이 우리를 둘러싼 땅의 색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의 힘에 어느 정도 무게를 둔다면, 그가 이 색을 발명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단 며칠 동안 서울 근교의 풍경을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윤형근의 색과 마주하고 있었고, 그것은 틀림없이 한국 땅의 색이었다. 이 색을 표현하기로 한 그의 결단에 담긴 힘을,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아는 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작가의 판단이 지닌 정확성, 곧 그 절대성은 말할 것도 없다. 자연의 깊이와 마주한 이 감정의 깊이에서 표현이 나올 때 세계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체계가 작동한다. 어쨌든 길이 열리자마자 그것은 이 풍경을 바라보는 갓난아기의 눈빛을 드러낸다. 이것은 그리움의 색이다. 윤형근의 색은 그리움처럼 내게 다가온다. 내가 서툴고 불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목공품』에서 조선 목공예에 대해 한 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모든 물건이 정상적인 치수로 태어나지 않기에 세부가 부족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장인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있고, 그것이 더 편안하다. 한편 그 물건은 고귀한 물건이기에 더 세련되었다. 결코 차가워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너그러움과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지적인 업(業), 움직임, 기교, 섬세함 같은 것들은 조선의 목공품 앞에서 증발해 버린다.” 그리고 아사카와 다쿠미가 도자기에 대해 한 말이 있다. “꾸밈없는 형태 속에 세련된 무언가가 있고, 형태 없는 형태 속에서도 결코 고요를 잃지 않으며, 꾸밈없는 형태는 대담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을 결코 해치지 않고, 화려함은 없지만 결코 침울하지 않다.” 색은 깊이와 표면에 깊이 닿아 있다. 세기를 거듭하며 표현되어 온 것, 진정한 독창성이란 강한 개성과 자연이 부딪치며 공존하는 데서 오는 무개성의 빛남이다.

 

서둘러 말하자면, 이 양식은 윤형근 같은 한국 작가들에게서 발견된다. 차가워 보이면서도 뜻밖에 끈질기고 따뜻한, 강하고 신선한 질감이다. 이것은 모든 감정을 끊어 내는 직선과, 본래 강한 연속성을 지닌 곡선 사이에서 두 번째를 택한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마음은 이미 곡선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닮았기에, 어디서든 시작하고 어디서든 끝날 수 있는 듯하다.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의지는 곡선과 함께한다.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려질 수 없다. 수묵화를 배울 때 열흘 동안은 굽이쳐 흐르는 물을, 닷새 동안은 바위 하나를 그리는 수업이 있다. 이는 곡선이란 산 반대편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산비탈을 오르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것과 같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숨이 차면 멀리 갈 수 없다.

 

이 경우에도 윤형근의 캔버스에서 곡선은 보이지 않으며, 곧고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모양의 돌을 닮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계룡산의 쇠빛 같은 색으로 도자기를 빚은 장인들의 마음처럼 길고 담담한 선의 모습을 띤다. 이러한 전개는 그가 장인들의 힘을 조금씩 흡수한 결과다. 곡선의 형태가 맨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나는 감히 그것이 거기 있다고 말하겠다. 엄버를 흙의 색에 견준다면, 우리는 작가의 마음속에서 증발해 버린 모든 곡선의 기억, 이를테면 굽은 길과 지붕의 물매, 산의 비탈과 강의 굽이, 굽이치는 구름과 사계의 바람,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형태의 기억이 펼쳐진 면을 규정할 수 있다. 우리는 정육면체의 여덟 꼭짓점을 한꺼번에 볼 수 없지만, 양식은 그것을 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에서 나온다. 작가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無)가 너무나 풍요로워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려 하며, 무의 풍요 속에서 이 단순함의 결은 거의 필연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윤형근이 보려는 것은 단순한 육면체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품는 여섯 방위의 조화, 곧 우주다.

 

실제로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추상적인 붓질을 바라보면, 때때로 절벽 아래 풀숲, 인적 없는 긴 길, 해 뜨기 전 검은 흙의 알갱이, 맑은 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느껴진다. 또 하나의 산수화다. 그러나 이 감수성은 절대적으로 현대적이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새로우며, 절대적으로 놀랍다. 그리고 이 은은한 새로움은 하나의 선이 될 수 있다. 흙의 색을 지녔기에 그 선은 보이지 않게 된다. 선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다 해도 그 선을 떠받치는 성품은 남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본질이다. 아름다움을 중심에 둔 세련된 취향, 그리고 형태의 변용을 넘어선 단순하고 강한 빛이 여기서 다시 한번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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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여숙화랑 개인전 도록, 서울, 2003

선적 성찰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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