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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가 일어서다

미셸 누리차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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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가 일어선다. 그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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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출현.

 

하나의 현존.

 

흘러내림이 아니다. 흔적이 아니다. 하나의 표지다. 더는 환원할 수 없는 일종의 거기-있음. 수줍고 말이 없는,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무엇.

 

물러서 있는 에너지의 한 형태, 언제나 그것에 생명을 주는 근원 가까이에 머무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를 실현하는 진리.

 

이것이 윤형근의 회화다. 그는 그림자 없는 작가다. 나는 그를 어떤 계보나 유파, 역사, 심지어 한국 혹은 국제 현대미술의 영역에 귀속시키는 일이 늘 불편했다. 내게 그는 거의 스스로 태어난 존재, 오직 자기 자신과만 견줄 수 있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화가가 무(無)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먼저 그는 유화로 그림을 시작했다. 전통과 관습이 여전히 먹과 종이를 선호하던 아시아의 이 지역에서 유화가 아직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50년대에 그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는 오늘날 그다지 환영받는 이력은 아니다.

 

그는 1928년 남쪽 산간 지역 한가운데에서 담배 농사를 짓는 농가에서 태어났다. 혼란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참혹한 시기에 십 대를 보냈으며, 역사의 전환점에서 작가가 되었다. 아시아의 작가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대개 모방하는 데 그치는 듯했던 모더니티의 일부가 되어야 했던 때였고,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전반, 특히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때였다.

 

이웃 섬나라에 맞선 저항에 가담해야 했다. 나라는 침략당하고 식민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황폐해지고 자기 자신, 그 핵심마저 빼앗겼다. ‘살아 있는 보물’이라 불리던 도자기의 위대한 장인들은 한국에 정체성을 부여하던 모든 것과 함께 끌려갔다.

 

이후 일본의 힘은 ‘미국이라는 친구’로 대체되었는데, 이 역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국립대학을 폐쇄하고 한국의 전통적인 대학 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꾸려 할 만큼 침투적이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윤형근은 우익과 군부가 뒷받침한 이 두 번째 식민화에 격렬히 맞섰다. 유일한 저항이 좌익에서 나왔기에 그는 좌익의 편에,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쪽에 섰다. 그에게는 그 생각들이 옳아 보였다.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인간적’인 것으로.

 

어쨌든 오늘날 그는 그렇게 말한다.

 

1988년 올림픽을 맞아 조성된 조각공원을 보러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때도 그는 거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와 나눈 네 번의 인터뷰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대화 상대에 따라 말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같은 질문들이 남고 같은 대답들도 남는다.

 

1995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와 나는 1975년 이후 녹음해 둔 스무 편이 넘는 인터뷰를 책으로 묶을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대화의 반복적인 성격에, 그리고 오랜 시간 그 변화를 지켜본 소수의 작가들과 나누는 이런 대화의 묘미, 때로는 그 가치 자체를 이루는 몇몇 작은 어긋남에 즐거워했다. 그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지만 나는 테이프를 다시 들었다. 볼탕스키가 리히터만을 신봉하든 길버트 앤 조지만을 신봉하든, 작가를 광대로 보든 사제로 보든, 모든 질문과 모든 대답은 두세 가지 본질적인 지점을 축으로 돈다. 윤형근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같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반복의 이유, 혹은 반복처럼 보이는 것의 이유. 서예, 침묵, 정신적 탐구, 서양과 동양의 관점에서 본 그의 처지. 무엇보다 1950년 6월 27일 벼락처럼 그를 덮친 하나의 결정적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그 바탕은 도덕적이며, 다루기 힘들다기보다는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전적으로 인간적이어서 자명해지는 절박함을 품고 있다. 뻣뻣함이 아니라 곧음에 관한 것이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들은 이랬다. “그림은 정신을 전하는 것이다.” “예술은 고요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안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도덕이 없어서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 마지막에 한 말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사람은 끔찍한 경험을 해 봐야 한다.”

 

이 대목에서 윤형근은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1950년 6월 27일, 스물두 살이던 그는 같은 대학의 학생 마흔 명과 함께 처형을 위해 줄 세워졌다(그는 열네 번째 자리에 있었다). 대부분이 죽었다. 다섯 명이 살아남았다. 윤형근은 천안의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긴 커다란 혼잡과 뒤이은 혼란을 틈타 달아났다. 다음 날 아침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 뒤로 세 차례의 투옥, 끊임없는 도피, 그리고 집 옆 기차역에 40분 동안 이어져 그를 두 번째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폭격도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다.

 

도스토옙스키는 사형 선고를 받고, 병사들이 총을 장전하고 쏠 준비를 마친 순간에야 차르의 사면이 도착한 모의 처형을 겪기 전과 후에 같은 작가가 아니었다. 윤형근 역시 1950년 6월 27일 이후로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것을 ‘결정적’일지언정 하나의 ‘경험’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쇼의 표현을 빌려 ‘심연으로부터의 앎’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것, 아니 차라리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다. 절대적인 공포. 누가 그런 격변을 나눌 수 있을까.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깊은 고독인가.

 

공포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넘어서, 남은 날들을 살아 있음을 확인하며 보내지 않는 한. ‘일어서 있는 사람’임을 주장하며. 수직의 그림을 그리며. 삶이라는 가장 소중한 소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말하는 것, 스스로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그러려면 회화를 일화와 형식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곧장 핵심, 본질로 가야 한다. 집중.

 

열려 있으면서도 집중하는 것.

 

미니멀리즘이 거론되어 왔다. 윤형근이 저드의 눈에 띄었고, 이 극도로 밀도 높은 작업이 제한된 어휘에 기대고 있으며, 그의 회화가 어디에 속하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나 예술적 실천을 설명하지 못하는 비평가의 무능이, 단순하고 막연히 형식적인 연관에서 지식을 구하는 경직된 근사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회화는 말 이전의 세계라고 말하는 윤형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글을 쓰는 우리는 시의 영역에서 이 세계와 공명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애써야 한다. 아르토가 반 고흐를 위해 한 일을 보라. 작품의 심장부로 뛰어드는 그 엄청난 투신, 그리고 회화의 우레와 함께 나아가는 그 흔들리고 심연 같으며 신경질적인 산문을.

 

윤형근의 회화는 폭풍이 지나간 뒤에 온다. 죽음과 변용?

 

그렇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집중 끝에 서예의 획처럼 바닥에서 수평으로 그려지는 회화다. 색은 짙은 청색과 갈색으로 줄어들어, 표백하지 않은 캔버스 위에서 거의 검정에 가깝다.

 

그는 말한다. “검정은 모든 색을 품고 있다.” 그것이 전부다. 윤형근에게 아름다움은 내면의 것이다.

 

집중되고, 강렬한.

 

그는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매일매일, 자신을 온전히 쏟아부으며. 캔버스 속에, 기름과 안료의 몸 속에, 그는 “나는 한 번도 청춘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게 하는 그를 사로잡은 끔찍한 과거와, 늘 다르게 “일어서는 그림”으로 흘러드는 현재를 함께 새긴다. 어떤 이는 거기서 한 사람을 보고, 어떤 이는 한 그루 나무를 본다. 곧게 서서, 죽어 가며, 흙으로 돌아가고, 흙이 되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나무를.

 

그것은 불교적 관념이지만,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기도 하다. 윤형근은 니체에게서 꽤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그 유명한 “피로 써라”를 떠올려 보라. 이 말 역시 그의 요점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한 미국 비평가는 이 문제를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림의 갈색 속에서 엉긴 피의 흔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 뒤로 윤형근은 이런 종류의 말에 조금 지쳐 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림만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림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말한다. 그에게는(“그것이 핵심 생각”이라고 그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사람 또한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워야 한다. 연결이 있어야 한다.

 

그는 말한다. “작가는 지성의 에너지에 태양의 에너지를 더해야 한다.”

 

그것이 윤형근이다.

 

그는 서양에서 이성이나 분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변하지 않는 것에 매혹되어 마음껏 그 속으로 파고든다.

 

신경까지.

 

근원까지.

 

기원까지.

 

마침내 회화가 움직이는 지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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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쟝 브롤리 갤러리 개인전 도록, 파리, 2002

회화가 일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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