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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 Hyong-keun : About ‘Relationship’

김인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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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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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었다,
이일이 죽고,
한창기도 죽고,
조셉 러브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도 죽었다.
나만 남았다.
내가 좋아하던 친구들은 다 죽었다.
(윤형근, 200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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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작은 수첩에 끝이 비스듬히 뾰족한 기둥 하나를 세워 그리고 위의 글을 적었다. 작가의 이 짧은 '회고'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하려면 여기 언급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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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1932–1997)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로,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하고 1957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러 떠났다. 1965년 귀국한 뒤 홍익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전후 한국 작가들의 예술적 성장을 이끈 이론가이기도 했다. 미술의 구성 요소가 결국 가장 근본적인 상태와 개념으로 수렴한다는 그의 '환원(還元)' 개념은 한국 단색화 운동의 이론적 틀이 되었다. 이일은 윤형근과 가까운 친구였고, 두 사람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여러 일을 함께했다. 1995년 제46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전 커미셔너를 맡았을 때 이일은 김인겸, 전수천, 곽훈의 작품과 함께 윤형근의 그림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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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1936–1997)는 미술계 인사는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윤형근과 '미적 태도'를 가장 가깝게 나눈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이자 유일하게 판매한 사람이었다. 사업으로 번 돈으로 한창기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힘썼다. 특히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창기는 한국 민예의 가치에 대해 깊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그와 윤형근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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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P. 러브(1929–1992)는 미국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활동한 미술평론가로,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1967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도쿄 조치 대학에서 가르치며 미국 미술 잡지를 통해 일본 현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했다. 러브는 이우환을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74년 서울을 찾았을 때 윤형근의 그림을 만났다. 그 그림에 매료된 그는 윤형근 작품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얼마 뒤인 1976년 도쿄 무라마쓰 갤러리에서 윤형근의 첫 개인전을 마련하며 전시 리플릿에 인상적인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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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화랑주가 되기 전 작가였던 황현욱(1948–2001)은 스무 살의 나이 차에도 윤형근과 각별한 사이였다. 서양 모더니즘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화랑을 열고 싶었지만 밑천이 없던 황현욱을 윤형근은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윤형근이 자금을 보태 준 덕분에 황현욱은 1988년 서울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열 수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한국이 갑자기 외국에 문을 연 시기, 이 화랑은 해외의 뛰어난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한국에 소개했다. 1991년 도널드 저드 개인전과 1993년 리처드 롱 개인전은 그곳에서 열린 수많은 전시 가운데 두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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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저드(1928–1994)는 미국 미니멀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지만, 저드는 "특정한 사물(specific objects)"의 물리적, 현상학적 경험을 강조했고, 그에 따라 형태, 비례, 색, 물성의 '단순'하고 '간결'한 성격을 추구했다. 1991년 인공갤러리에서 한국 첫 전시를 열었을 때 저드는 윤형근의 서울 작업실을 찾았고, 첫눈에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저드는 이후 뉴욕(1993)과 텍사스 마파(1994)에 있는 자신의 전시 공간에서 윤형근의 미국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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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 10년 가까이 그린 윤형근의 '천지문(天地門)' 연작이 자기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작가의 몸부림을 드러낸 것이라면, 그 좁디좁은 문 사이를 서성이던 윤형근이 고독의 터널을 빠져나오도록 붙들어 준 것은 그가 "좋아하던" 몇몇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윤형근은 '문'의 구도에서 벗어나 작품에서 미묘하지만 다양한 실험과 관심의 이동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종이/캔버스와 물감의 상호작용'을 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 '한지' 작업으로 돌아갔다. 물감이 표면에 스며들고 흘러내리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이때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표면과 테레빈에 묽게 갠 물감 사이의 탄력과 긴장이 후기 작업의 주제가 되었다. 그는 엄버를 넉넉하게 써서 '시간'의 문제를 온전히 그려 냈고, 때로는 화면 전체를 칠해 '흙'을 떠올리게 하는 화면을 만들기도 했다(1988–1989).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윤형근은 표면과 물감의 상호작용, 칠해진 기둥들 사이의 역동을 탐구하며 끊임없이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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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캔버스들은 당시 일본의 화랑들에서 꾸준히 폭넓게 소개되었고, 새 그림은 언제나 황현욱의 화랑인 수화랑과 인공갤러리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1992년 윤형근은 테이트 리버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 단체전 «Working with Nature»에 참여했고, 이후 저드가 마련한 뉴욕과 마파의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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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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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도널드 저드는 1991년 인공갤러리 개인전 때문에 서울을 찾았을 때 윤형근을 처음 만났다. (저드는 1947년 군인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으며, 그 무렵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한 바 있다. 44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저드는 급변하는 서울의 도시 풍경에 대해 쓴소리를 남겼다. Donald Judd, Writings 1958-1993, Judd Foundation and David Zwirner Gallery, 2016, p.744) 저드는 그 자리에서 윤형근의 작품 세 점을 샀고, 뉴욕 저드 재단(1993)과 마파 치나티 파운데이션(1994)의 개인전에 윤형근을 초대했다. 윤형근 역시 저드의 서울 전시에서 작품 한 점을 사서 거실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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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과 도널드 저드는 둘 다 순박한 시골 사람의 태도를 지녔고, 평생 그것을 깊이 지향했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소박한 삶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았다. 관찰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치려 애썼고, 자연에서 얻은 지혜와 통찰로 작품 속에서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경지를 추구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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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두 작가의 교류가 서로 통하는 지점을 바탕으로 서로의 작업에 계속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점이다. 도널드 저드는 1991년 한국에서 가져간 종이로 판화를 찍으며 한지 특유의 물성을 실험했다. 아시아가 원산인 닥나무의 속껍질로 만드는 전통 종이 한지는 먹과 물감을 빨아들이는 뛰어난 능력과 500년 넘게 견디는 내구성으로 높이 평가받는 재료다. 저드는 일정한 비례와 패턴의 격자, 그리고 색을 입힌 목판을 종이에 찍어 한지 표면의 질감과 색조가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 시기 저드의 목판화 연작은 뉴욕 저드 재단에서 볼 수 있다. Prints: 1992, Judd Foundation, 101 Spring Street, New York, March 1-July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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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쪽에서는 도널드 저드를 만난 뒤 작품에서 '단순화'를 향한 과감한 전환을 꾀했을 뿐 아니라 그 추구에 흔들림 없는 확신을 얻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이던 그림의 다채로운 표현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차츰 사라졌고, 색은 순수한 검정으로 줄어들었으며 형태는 완전한 직사각형에 가까워졌다. 색과 형태에 대한 윤형근의 새로운 접근은 크기와 비례에 숨은 '질서'에 충실하려는 단호한 지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 시기 윤형근 작품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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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월 저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윤형근의 미국 개인전은 예정대로 7월 텍사스 마파의 치나티 파운데이션에서 열렸다. 이 전시에서 윤형근은 더 이상 군더더기는 필요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듯 같은 크기의 캔버스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걸어, 작품의 지극한 단순함을 요약해 보였다. 검은 직사각형은 한층 더 단순해졌지만, 창으로 들어온 바깥의 빛이 캔버스 표면에 닿으면서 그림은 눈길을 끄는 풍부한 효과를 냈다. 가장 단순한 형태와 가장 균일한 색을 지닌 사물이 어떤 공간을 차지할 때, 그것은 오직 '크기'와 '비례'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말한다. 같은 크기의 그림들을 거듭 나란히 놓으면서 윤형근은 작품의 초점을 그림과 그림 사이, 그리고 그림과 전시 공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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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군 막사였던, 같은 구조가 되풀이되는 건물들 안에서 댄 플래빈의 형광등은 미묘하게 변하는 빛깔을 내뿜으며 공간 속에 '존재'하고, 칼 안드레의 작품은 무심히 바닥에 놓여 있다. 그 건물의 한 구역에서 윤형근의 캔버스들은 벽에 한 줄로 걸린 채 묵묵히 제 몫을 다한다. 도널드 저드가 오랫동안 추구한 예술의 비예술적 극단이 마파에서 작가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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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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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삶'이란 누구에게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따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 스며들고, 반응하고, 때로는 긴밀하게 이어지며, 서로 기대고 의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모여 단지 '영향을 준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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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윤형근의 그림에 끌린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의 힘'이라고 부른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예술'이 겉보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해도 우리 일상의 삶에 관한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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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그림은 여러 면에서 우리 삶의 이치를 무심히 건드린다. 그 가운데 분명히 짚어 둘 만한 한 가지가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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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KM 갤러리 «윤형근 1989–1999» 전시 도록, 서울, 2020

Yun Hyong-keun: About ‘Relatio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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