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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침묵의 회화

윤형근: 침묵의 회화

오광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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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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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 미술계는 지금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화랑 제도가 아직 자리 잡지 못했고, 대부분의 한국 작가에게는 혼자 힘으로 개인전을 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작가가 홀로 나서 대중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은 대담하고 위험한 걸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대다수 작가는 그룹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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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윤형근이 1960년대 초 여러 그룹전에 참여했음에도, 그의 실질적인 데뷔는 1966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연 첫 개인전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그의 개인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화풍이 국전이 선호하던 아카데믹한 미술에도, 같은 세대 작가 대부분이 탐구하던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도 들어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윤형근의 초기 작품을 기억하는 이가 매우 드문 것도 그래서다. 사실 나 역시 1966년 전시에 대한 기억이 다소 흐릿하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작품들이 김환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느낌 정도인데, 아마 윤형근의 진중한 마티에르와 인상적인 색채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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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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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대로 윤형근은 오랜 세월 놀라울 만큼 일관된 화풍과 예술적 방향을 지켰다. 그의 작품에는 구체적인 형태나 대상이 없어 추상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그의 그림은 색채와 기법 면에서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1970년대는 그가 이후 평생의 작업을 특징짓는 미학을 정립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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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으로 변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깨달음처럼 빠르고 급격하게 변하는 작가도 있다. 1970년대 초 갑작스러운 화풍의 변화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 윤형근이 바로 그런 경우다. 물론 변화가 뚜렷할수록 그 까닭이 더욱 궁금해진다. 윤형근 자신은 작업의 급격한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197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서 느낀 분노 때문에 내 그림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전에는 색을 썼는데, 색이며 화려한 것이 다 싫어졌다. 그래서 그림이 어두워졌다. 그림으로 내 안의 울분을 다 쏟아내며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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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회고에 따르면 윤형근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나거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1973년의 투옥은 그가 가르치던 고등학교에서 정권과 연줄이 닿은 학부모의 자녀를 부정 입학시킨 일에 항의한 사건 때문이었다. 평소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윤형근은 불의 앞에서는 언제나 굽히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1984년 경원대학교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십여 년 동안 다시 교직을 얻지 못했다. 그는 훗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경원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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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자신이 말했듯, 화풍의 변화는 거듭된 부당한 투옥 끝에 '울분을 쏟아내는'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이전 작품의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 구성을 허식으로 여기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깨달음은 다름 아닌 참된 자기의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부터 윤형근의 작업은 '거의 요령 없이 줄곧 같은 방향을 고집하는 기질'[ii]에 이끌렸다.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그런 일관성을 지켰다는 사실은 이 방향이 곧 그의 존재 전체라는 확신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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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이후 윤형근 예술의 결정적 특징은 그리는 행위의 자동적 수행이다. 시대정신으로 그리는 행위를 회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대개 선의 반복을 보여 주는 드로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70년대 초 작품의 수직 구도는 상승하는 힘의 구조를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반복을 통한 힘의 내면화와 상승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자연스러운 흡수를 통해 색은 캔버스의 천과 하나가 되어 작품에 온전함을 부여한다. 이렇게 색면의 구성이 독자적으로 만들어진다. 테레빈유와 아마인유로 묽게 희석한 물감을 넓은 붓으로 넉넉히 칠해 생캔버스에 스며들게 두면, 단단하고 치밀한 감각이 생겨난다. 따로 떨어진 물질의 층이라는 이전의 상태를 잃은 물감은 얼룩처럼 캔버스에 배어들며 비물질화된다. 이렇게 물질이 물질을 지우는 순간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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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몇몇 단색화 작가들은 반복적인 그리기 행위를 통해 자신을 해방하고 자연에 다가가고자 했다. 윤형근이 분명히 밝혔듯, 그의 반복적 행위는 내면의 울분을 희석하려는 것이었고, 어떤 경지의 진실함에 이르려는 과정이었다. 몇몇 단색화 작가들처럼 윤형근도 궁극적으로 '자연 속에 사는' 상태를 추구했는데, 이는 자기표현의 모든 시도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존재의 상태로 초월되는 무위(無爲)와 연결될 수 있다. 이런 의도를 알아본 나카하라 유스케는 윤형근의 작품이 '꾸밈없음으로써 기교에 이르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회화'라고 평했다.[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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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윤형근은 의식적인 목표 없이 그리지만, 결국 무(無)와 같은 무언가가 만들어진다"고 쓴 적이 있다.[iv] 지바 시게오는 윤형근의 작품이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표현하며 … 우리가 흔히 회화나 미술이라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v] 이런 평을 예견이라도 한 듯 윤형근은 이렇게 적었다. "내 작품은 비(非)회화다. 그림이 아니라 나 자신과 같은 것, 말 이전의 것,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일기장의 하루하루 기록 같은 것이다." 미셸 뉘리자니는 윤형근의 예술을 "하나의 출현. 하나의 현존. 흘러내림도 아니고 흔적도 아니다. 하나의 자국.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일종의 거기-있음. 거의 수줍고 고요하며, 움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활동하는 무엇"이라 불렀다.[vi] 당연하게도 윤형근의 노트에는 자연에 관한 언급이 많다. "내 그림은 자연스럽게 되었으면 한다. 보는 이가 주목하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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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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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무렵 '자연스럽게 되는 그림'이라는 윤형근의 작업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제」 연작이 제목에 '청색'이나 '다색'이 들어간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화풍은 완성되었다. 윤형근에게 색은 다른 무언가를 그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의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작품의 목적이자 본질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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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팔레트는 엄버와 블루(남색 또는 울트라마린) 단 두 가지 색으로 한정된다. 그는 물감을 테레빈유와 아마인유로 묽게 한 뒤 처리하지 않은 캔버스에 칠해 섬유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이 과정에서 색은 익어 가듯, 혹은 발효되듯 변색 현상을 거치며 다른 색조를 띠게 된다. 한편 면포나 한지의 질감은 거친 감수성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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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이 생캔버스에 작업하기로 한 데에는 색면회화 운동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그는 초기의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가 뉴욕 시절(1963–1974)에 만든 작품에도 깊은 경탄을 표했다. 뉴욕으로 건너간 뒤 김환기는 화풍을 바꾸어 거대한 전면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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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이 색면회화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는 있지만, 그의 작품을 그 양식의 단순한 이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김환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시대 미술계에서 영향의 출처를 뒤지기보다, 각자의 방법에서 그들 작품에 내재한 미학을 밝혀내는 편이 낫다. 이런 점에서 김환기의 전면점화와 생캔버스 위에 묽은 물감을 올린 윤형근의 작품은 모두 동양 회화의 오랜 전통 안에 자리매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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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윤형근의 작품에는 대개 화면 아랫부분에서 솟아오르는 두 개의 수직 기둥(뒤에 셋, 넷으로 늘어난다)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작품은 기둥들과 그 사이의 빈 공간이 이루는 공간을 펼쳐 보인다. 기둥은 동양 산수화에 자주 등장하는 거대한 암벽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보면 기둥 사이의 틈은 폭포가 되거나, 저 너머의 열린 공간으로 넓어지는 텅 빈 허공이 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풍요로운 세계의 지평으로 열리는 '추상적 풍경'이라 규정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윤형근 자신은 청색을 하늘의 색, 다색을 땅의 색이라 했고, 그래서 그 공간을 '천지문(天地門)'이라 여겼다.[vii] 이 구성은 또한 음과 양, 있음과 없음의 대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극적인 순환과도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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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트 엄버나 블루의 단단한 띠에서 색이 은은하게 스며 번져 나가는 모습이 그의 작품에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다. 가운데의 색은 거의 검정에 가깝지만 번져 갈수록 옅어지며 무한한 층을 만든다. 번짐의 바깥 가장자리에는 색이 전혀 없어, 번짐 그 자체의 존재만을 드러낸다. 이런 효과는 젖은 바탕에 먹을 올리는 기법을 쓴 전통 수묵화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캔버스에 적용되면 보다 구조적인 성격을 띤다. 윤형근의 작품에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가 직접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행위의 존재는 여전히 느껴지며 화면을 깊은 울림으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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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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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예술에서 엄격하게 절제된 엄버와 블루는 그 자체의 존재로 자연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 풍경은 묘사된 장면이나 요소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의 회귀다. 그림으로 그림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그의 예술은 어떤 특정한 영역에도 묶이지 않는, 그래서 온전히 해방된 새로운 차원을 지향한다. 미셸 뉘리자니가 단언했듯 윤형근은 "유일무이하며, 스스로가 자신의 기원이고, 오직 자기 자신과만 견줄 수 있다."[viii] 그래서 윤형근은 오랫동안 단색화 작가들과 유대를 나누면서도 그 흐름과 거리를 두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작가로서 그의 개성은 언제나 어떤 집단적 정체성보다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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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이 동시대적 감수성을 지닌 집단들과 거리를 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늘 전원적인 것, 목가적인 토착성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김칫독처럼 촌스러운 그림"이라 했다. 같은 느낌을 이어받아 조셉 러브는 윤형근의 예술이 "단순한 무엇 … 한국 시골의 김칫독처럼 흙냄새를 풍긴다"고 평했다.[ix] 이 투박한 토착성 때문에 외국 관객이 일부 한국인보다 그의 작품에 더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 엄버와 블루를 섞은 윤형근의 색에서 풍기는 삭아 가는 느낌은 편안함이 아니라 독 속에서 익어 가는 발효의 냄새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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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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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이르러 윤형근의 작품과 예술적 원숙함은 국제적으로 인정과 찬사를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국내보다 세계 미술계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그 이전부터도 윤형근은 해외에 소개되는 한국 대표 현대미술 작가에 자주 포함되었다. 1992년 테이트 리버풀의 그룹전 «자연과 함께 작업하기(Working with Nature)»에서 작품으로 널리 호평을 받았고, 도널드 저드와의 만남은 1993년 뉴욕 저드의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으로 이어졌다. 1995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소개된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윤형근이 한국 미술계를 넘어 국제적인 작가가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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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2007년까지 윤형근이 제작한 작품을 보면 이전의 '추상적 풍경'과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후기작 가운데 상당수는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가 화면 전체를 채운다. 그 빽빽한 포화는 보는 이가 풍경을 떠올리지 못하게 할 만큼 숨 막히는 효과를 낸다. 그 구성은 오히려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철문을 연상시킨다. 김칫독 같은 투박한 소박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엄격한 자기 절제가 더해졌다. 채움과 비움의 공존은 모든 생각과 형태를 침묵, 곧 무위(無爲)로 돌려보낸다. 평면에 갇힌 시각의 연장이 아니라, 그의 예술은 오직 스스로에게 온전히 바쳐진 하나의 전체로 환원되었다. 이것이 바로 윤형근이 펼쳐 내고자 한 세계, 곧 회화와 표현과 형식에서 벗어나 지각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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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류병학,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그림」, 『월간미술』,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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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아지마 도로(東後郞), 「선적 사고의 고고학」, 『윤형근 근작: 엄버』(오사카: 야마구치 갤러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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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나카하라 유스케, 「윤형근의 회화」, 『윤형근』(스즈카와, 위마니테, 야마구치 갤러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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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오광수, 「자연으로서의 현존」, 『윤형근』(서울: 갤러리 신라,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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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지바 시게오, 「윤형근의 발자취와 그의 우주」, 『윤형근』(서울: 아트선재센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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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미셸 뉘리자니, 「그림이 일어선다」, 『윤형근』(파리: 장 브롤리 갤러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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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1977년 1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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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뉘리자니,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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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조셉 러브, 「윤형근의 작품」, 『윤형근』(서울: 문헌화랑,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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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전시 도록, 서울, 2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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