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의 발자취와 그의 우주
지바 시게오, 2001
I.
한국 현대미술은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 첫 번째 운동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친 앵포르멜로 촉발되었다. 한국의 앵포르멜이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한국 앵포르멜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젊은 작가들(박서보, 김창열, 윤명로, 정창섭 등)에게 기존의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추구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일본의 앵포르멜이나 반예술 운동과 비슷하다.) 둘째, 시작 단계의 노력에 그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기존의 예술 형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이런 운동이 반세기 전 유럽에서 일어났다면 인간의 무의식을 이용하거나 추상에서 새로운 형식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은 형식 그 자체를 벗어던지려 애쓰면서도 여전히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다. 모노크롬, 올오버 페인팅, 색면 회화를 예로 들면, 이들은 여전히 형식 없는 회화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앵포르멜 세대는 형식에서 벗어나는 데 큰 장애에 부딪혔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경제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고,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한국인들이 문화적 정체성에 강한 관심을 보이던 때였다. 시행착오가 반복되었다. 앵포르멜 작가들 가운데 일부는 형식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가, 또다시 돌아갔다. 전자에는 김창열이 있었고, 후자의 작가들은 1970년대 모노크롬 작업을 만들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앵포르멜 세대는 형식뿐 아니라 회화 그 자체도 피했다. 그들은 그저 캔버스 위에 무언가를 할 뿐이고 그것이 회화로 보일 수는 있지만, 사실 그것은 회화가 아니라 작업이다.
모노크롬의 특징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물질(사물과 안료), 질감, 그리고 작업 과정이다. 그것은 여전히 회화이지만 기존의 회화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회화라고 하면 대개 서구 미술의 회화를 바탕으로 생각한다. 모노크롬 작업을 그저 회화라고 부르면 이 예술 형식의 본질을 전하지 못할 수 있다. 내가 이들을 회화보다 예술 작업이라 부르기를 선호하는 이유다. 모노크롬 작업은 무언가를, 이미지나 환영을 보여 주지 않는다. 물론 안료로 된 어떤 사물을 보여 주지만 그 물질성에 초점을 두지는 않는다. 이미지를 질감으로 대체하려는 것도 아니다. 작품에 과정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회화라는 말은 공간감을 함축하지 않는 반면 모노크롬은 공간감을 지닌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기존 회화의 공간감과는 다른 공간감이다.
II.
윤형근은 박서보, 정창섭, 하종현, 최명영 등과 함께 모노크롬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내 생각에 한국의 모노크롬 그룹은 이른바 한국전쟁 세대와 4·19 세대로 이루어져 있다. 윤형근은 전자에 속하지만 출발은 다른 작가들보다 늦었다. 미술평론가 이일에 따르면, 윤형근의 예술 세계는 모노크롬 미술의 일반적인 특징과는 조금 다르다. 그의 기억으로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윤형근의 초기 작품 하나가 모네의 〈수련〉의 한 부분을 확대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모노크롬과는 다른 종류의 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모노크롬에 합류한 계기는 1970년대 중반 에꼴 드 서울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상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노크롬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1967년 이전에 제작된 그의 작품은 찾을 수 없다. 남아 있는 작품은 1970년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모노크롬 미술의 준비 단계였던 1972년의 회화는 1994년에 본격적으로 확립된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을 보여 준다. 이런 맥락에서 1967년부터 1970년대에 걸쳐 제작된 작품들은 그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가는 길을 크게 닦아 주었다. 그의 회화는 한국전쟁 세대나 모노크롬 그룹의 회화와 구별될 수 있는데, 그의 배경과 동기가 그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과 어떤 공통점을 공유하면서도 사회와 그 전통, 그리고 자연에 더 관심을 둔다.
작가들은 대개 모호한 표현으로 원초적인 행위를 보여 주는 앵포르멜에서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가는 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윤형근은 그가 살아온 배경의 영향으로 예술 그 자체보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더 중시한다. 그는 삶에서 결정적인 시기인 소년기와 청년기에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 한국전쟁과 그에 따른 격동 등 한국의 비극 대부분을 겪었다. 우리의 고통을 덜어 준 것은 자연이었다. 산과 강은 추한 삶의 장면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따뜻한 막을 드리웠고,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 주려는 것은 우리 삶과 자연의 이치에 가 닿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태도의 결과다.
윤형근은 그저 주류 미술의 흐름에 올라타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예술 형식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부침을 견디며 영감이 찾아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왔을 뿐이다. 무(無)는 그의 예술의 우주를 이끄는 위대한 스승이다. 이 철학적 사유는 그 뒤에 이루어질 수 있는 회화나 작업보다 더 무겁다.
어느 날 해 질 녘 오대산에 갔다. 가을의 전령인 낙엽으로 덮인 고요 그 자체였다. 산속 상원사에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숲이 있었다. 홀로 숲길을 걷는 데 빠져 있다가 문득 앞에 무언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커다란 나무였다. 그 나무가 얼마나 오래되었고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 누워 있었을지 헤아리다 전율했다. 백 년은 묵었을 나무가 썩어 가고 있었고 그 뿌리는 흙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의 이길 수 없는 섭리를 생각하며 이정표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며 남은 평생 그럴 것이다.
(윤형근의 노트에서)
인간이 만든 어떤 업적이나 위대한 예술 작품이 그 고목과 자연의 섭리가 만든 그토록 감동적인 순간을 이길 수 있을까. 이것이 삶이 먼저이고 예술은 그다음이라는 그의 인생철학의 출발점이다. 이런 태도 없이는 어떤 형태의 예술 창조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를 마음에 두고 윤형근은 자신의 예술의 우주를 세우려 한다.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한국의 선비, 나아가 다른 동아시아 예술의 태도를 잘 보여 준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말해 주는 것을 음미하며,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 헤아린다. 예술가가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있으며 자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윤형근과 그의 동료들은 명망 있는 한국 전통 학자인 선비의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선비는 역사 기록 속에만 살아 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윤형근 같은 후손에게 분명히 이어진다. 그는 선비는 아니지만 자기 나름의 언어로 그 정신을 다시 정의한다. 그에게 작품을 만드는 일은 일지나 일기를 쓰는 것과 같아서,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선비의 마음이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III.
나는 다시 윤형근의 작품과 마주한다. 그의 작품은 또다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물질도, 질감도, 작업 과정도. 어쩌면 그것은 모노크롬 미술도 아닐지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과장처럼 들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의 예술에 대한 내 인상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 윤형근은 바탕칠을 전혀 하지 않은 캔버스를 써서, 무언가가 재현되는 재료가 아니라 천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엄버(번트 엄버)와 청색(울트라마린 블루)만을 여러 번 칠한다. 질감. 어떤 사물이든 질감을 지니며,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이 질감에 주목한다. 그러나 질감은 다른 재료와 어우러질 때에만 드러나기에 예술이 도달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도자기는 백색과 청색이라는 색에서 독특하다. 그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질감이다. 그 질감 덕분에 이 도자기들은 박물관 유리장 속에 살아갈 운명임에도 감상자가 만지고 쓰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보인다. 내가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에 그리움을 느끼는 이유다. 질감은 사람들이 마음과 영혼, 그리고 몸까지 다해 작품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일 때 느껴진다. 작업 과정. 나는 그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그 실마리를 조금도 찾을 수 없다. 그의 예술을 만드는 과정은 작품 그 자체 아래에 놓여 있어서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나는 그의 예술이 모노크롬 그룹에 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엄버와 청색으로 캔버스를 여러 번 덧칠하지만, 그것은 짙은 갈색이 되고 캔버스의 일부는 날천으로 남는다.
이처럼 윤형근은 모노크롬 그룹과는 다른 방식으로 물질, 질감, 과정, 그리고 모노크롬을 사용하여 작품을 그린다.
많은 사람들이 모노크롬 미술을 새로운 형식으로 여기면서도 회화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것을 물질, 질감, 과정이라 부른다. 이런 맥락에서 모노크롬 회화는 서구 미술에서 말하는 회화와 조금 비껴 나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예술 형식이 새로운 형식이거나 동양 미술의 부흥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말은 윤형근이 일반적인 회화나 다른 예술 형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뜻을 함축할 수 있기에, 받아들이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IV.
나는 다시 윤형근의 작품 앞에 가만히 서서 가까이 들여다본다. 그의 예술의 우주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묘사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것은 그저 작품에 눈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무언가, 일종의 본질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내 감상이 그의 작품을 보는 데에만 머문다면, 나는 공간감을 경험할 수도, 그 물질성과 질감을 발견할 수도 없다.
나는 그의 작품이 걸린 전시장을 떠나지 못한다. 그 깊은 의미를 헤아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 눈은 그의 예술 세계의 더 넓은 범위에 가 닿는다. 그것은 단순한 예술 세계가 아니라 우주다. 이 우주에는 깊이도, 움직임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없다. 한마디로 그의 우주는 자연, 사회, 인간, 그리고 그것들의 추상적 개념까지 품는다.
윤형근의 예술적 고향은 자연이다. 나는 자연을 그의 고향이나 그의 나라 같은 구체적인 용어가 아니라 추상적인 용어로 쓴다. 그의 작품에서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느낀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 그 자체다. 개념은 자연과 반대로 해석된다. 그는 정교한 개념화의 과정을 거쳐 자연을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바꾼다. 다시 말해 자연은 그의 개념 속에 살아 있고, 그의 회화는 예술을 넘어 예술이 존재하는 그의 우주로 고양된다. 그러나 그의 예술 세계를 미니멀 아트(혹은 개념미술)와 비교할 필요는 없다. 강조해야 할 것은 오직 한때 도널드 저드의 깊은 관심을 끌었던 그의 우주의 개념화다.
윤형근의 예술을 감상하려면 오감, 심지어 몸과 덧붙여진 상상력까지 필요하다.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단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작품을 본다면 사람들은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 내 눈은 작품에서 초점을 잃고 내 시야는 내 몸의 크기만큼 넓어진다. 보통 시선은 한 점에 집중되고, 그렇게 한 점씩 본 결과가 마음속에서 구성되어 전체 그림을 파악한다. 윤형근의 작품 앞에서 내 시선은 한 점을 보는 기능을 버리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폭을 넓힌다. 내 시선은 내 몸이 되고, 그것이 윤형근의 작품을 받아들인다. 온몸으로 일어나는 것은 보는 것이라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보는 일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된다.
V.
윤형근은 자신의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현할 것인가를 표현해 왔으며, 이는 회화나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캔버스 위에 안료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회화로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다른 공간감, 형태, 색의 쓰임을 생각한 뒤에도 그것을 여전히 회화라 부를 수 있을까. 사실 그것은 회화가 아니다. 이는 그의 우주에서 자연이 무엇을 뜻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자연은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개념화다. 이일 역시 1980년대 윤형근의 예술에 대한 비평에서 이를 분명히 했다. 그는 윤형근의 예술을 불가능성의 회화라고 묘사했는데, 그의 예술에는 형태로 담아낼 수 없는 자연의 원초적 상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이일이 말한 자연이 고도로 개념화된 관념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는 형상이라는 관념에 매여 있었다. 윤형근의 작품에는 형상 같은 것이 없었다. 1980년대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의 일부는 거대한 나무의 줄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1990년대 〈Umber-Blue〉의 그것은 엄격한 사각형의 감각이 되었다. 이는 형상이 윤형근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자연의 원초적 단계를 어떤 형태로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절제되고, 지적이며, 엄격한 자신의 우주를 보여 주고자 했다. 경치 좋은 산수, 투쟁하는 노동자, 애처로운 얼굴 표정은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보여 줄 수는 있지만,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묘사하기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강도 높은 추상이 필수적이며, 그것은 물리적, 정신적 실체를 통해 표현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예술은 말이나 언어에 기대지 않는 것들을 주제로 삼으며, 더 나아가 어떤 특정한 의미나 방향을 지닌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사소하고 실물 크기인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시도이며, 때로는 오직 창작자만이 자기 작품의 의미를 정할 수 있다. 예술은 작은 의미들을 드러내려는 일종의 시도다. 윤형근의 우주는 그 자신이며, 그의 우주의 표현은 추상적인 의미로 묘사될 때 보는 이의 마음이 아니라 몸과 연결될 수 있다. 윤형근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순수미술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평생을 거기에 바쳤다. 그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나의 예술은 나 자신이지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것, 형언할 수 없는 것이며, 일기에 적는 나의 일상의 기록과 같다.” 윤형근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인 ‘나 같은 예술’은 사실 우주를 뜻한다. 그가 안에 지닌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문제만이 핵심인데, 그것 없이는 아무도 그것을 실제의 사실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밖으로 드러내는 데에는 그의 몸과 지각에 관련된 형식이 필요하다.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우주 전체만큼 거대한 공간의 형상으로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형식 속에서 일어나며 우리의 맨눈 앞에 재현된다. 나아가 그의 우주는 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VI.
한국의 모노크롬 작업이 기존의 회화에 속하는지 아닌지는 미술사가들이 판단할 몫이다. 모노크롬 작가들은 사실 회화도 예술 작품도 추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 작가들은 모더니즘의 종언을 마주하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어 내려 애쓴다. 그들의 태도는 모노크롬 작가들의 태도와 닮았다. 한국에서 모더니즘의 종언은 이미 한국전쟁 직전이나 직후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경제 호황을 누려 온 젊은 작가들은 이 의견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들은 소비 중심 사회의 대중주의와 정보화 시대에 더 익숙하다. 사회적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젊은 작가들과 모노크롬 작가들이 같은 흔적을 좇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세대로서 내게 이는 우리 사회의 양면을 보여 준다. 끼인 세대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영원이라는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어느 세대에게든 초점은 기존의 예술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부정하고 극복하느냐에 있다. 동아시아 미술의 모더니즘은 작가들이 서구 현대미술을 맹목적으로 따를 것인가,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이렇게 전개된다. 모노크롬 그룹은 서구 미술과는 다른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독자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서구 미술의 성취를 알고 있는 작가들은 이전의 전통 한국 미술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서구인들은 이런 노력을 이국 취향의 일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자포니즘을 포함한 이국 취향은 그들의 닫힌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것을 이국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막아 두고 몰래 즐기고 싶어 한다. 아시아인들은 그런 태도를 해석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할 수 있고, 이는 또 다른 이국 취향, 곧 역(逆)이국 취향을 낳는다. 우리는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할 수 없으며 자존을 지켜야 한다. 세계화나 국제주의는 때로 우리가 그들보다 열등하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한다. 새로움이 언제나 서구의 새로움과 같은 것은 아니다. 윤형근의 작품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모노크롬 작품들과 같지 않다. 모노크롬 미술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는 그의 예술 세계는 다른 작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예술을 새롭게 보는 것은 한국 미술 전체를 새롭게 보는 원천이다. 그의 작품은 독창적이다. 다양성과 혼종의 세기인 21세기에 그의 예술 세계는 한국 미술을 환하게 밝힌다.
VII.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윤형근의 작품으로 돌아온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의 작품은 지금 고요하고 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세계가 갈등과 물질적 풍요 속에 숨은 점진적 퇴락에 휩싸인 19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은 엄청난 긴장을 보여 왔다. 1928년에 태어난 그는 이러한 역경이 불러온 도전에 맞설 만큼 성숙한 어른으로 자랐다. 그는 예술에 대한 집중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더 어려워진다.” 윤형근은 말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성실함과 일관성은 매너리즘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창작에서 자족하거나 게을러질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는 스스로 정체되기를 허락하지 않으며, 일관성과 침착한 리듬을 지키며 천천히 작업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깨달은 뒤로 그는 같은 연작을 이어 왔지만, 그 작품들은 서로 똑같지 않다. 그의 우주는 일상의 한 조각 한 조각으로 지어지며,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원의 느낌을 준다.
나는 해변에 가만히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본다. 똑같은 파도는 하나도 없기에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파도는 영원히 이렇게 오고 갈 것이다. 되풀이해 밀려오는 파도와 나는 우주의 영원한 리듬 속에서 하나가 된다. 내 몸은 그 거대한 움직임의 작은 일부다. 윤형근의 작품은 그 파도와 같다. 게다가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해일 아래의 움직임 혹은 평온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다가올 우레의 징조일까, 고요의 징조일까.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오직 그의 내일의 우주만이 답을 알고 있다.
* from the exhibition catalog of
Yun Hyong-keun's solo exhibition
아트선재미술관, 서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