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
오광수, 1999
이른바 생캔버스(raw canvas)를 사용해 바탕에 직접 안료를 입히는 방식은 1960년대 중반 색면 화가들의 작업에서 널리 퍼졌다. 캔버스 전체를 쓰는 것 자체는 방법상의 현상이었지만, 서양 회화의 구조적 특징이던 일정한 안료의 두께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서양 회화의 긴 역사로 보면 오히려 구조의 변화에 가까웠다. 그러나 방법의 측면에서 보면 안료를 바탕에 직접 입히는 것은 동양의 서화에서 보편적으로 써 온 방식이었다. 동양의 작가들이 이러한 변화에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이미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동양의 서화는 종이에 먹을 직접 입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안료를 칠하고 쌓아 올리면서 생기는 마티에르나 어떤 바탕(막)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바탕 자체가 회화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는다. 동양화의 여백이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그려진 부분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서양 회화의 관점에서 보면 윤형근의 방법은 색면 화가들의 방법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지만, 그 오래된 초월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 서화의 방법과 곧바로 이어진다. 이러한 초월주의는 한국 현대미술가 상당수의 방법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요컨대 그들의 전위적인 서체 양식, 먹이 번진 듯한 물감의 번짐, 미묘한 농담의 변화는 모두 동양 서화의 방법을 곧바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어떤 외부의 자극이나 영향으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 본래부터 내재하던 요소가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윤형근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깊이가 색면 화가들의 작업보다 동양의 수묵화와 더 닮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양 서화가 지닌 방법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완성을 지향하기보다 진행과 전개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생성의 경향이다. 윤형근의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완성이 아니라 지금 진행 중인 어느 한 순간이다. 작가는 캔버스에 꾸준히, 그러나 거듭해서 선을 긋는다. 선 하나가 그 자체로 완성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 반복은 작가의 의도된 의지로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다시 또 다른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거듭 그은 선에서 비롯된 물감의 번짐은 생지의 바탕으로 스며들어 눈앞에 예기치 않은 존재를 만들어 낸다. 작가 자신의 말처럼 그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목적 없이" 그리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이것을 "싫증 나지 않는 그 무엇", 곧 언제나 새로운 무엇이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윤형근의 작품은 그림과 그 목적 자체를 지움으로써 드러나는 '그 무엇'의 역설을 만들어 낸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목적 없이"란 그림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 결과 눈앞에 존재하는 그림은 거기 있으면서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림, 곧 부재하는 그림이다. 이는 실은 그림이 자연스럽게 태어나고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싫증 나지 않는 그 무엇"이란 자연스럽게 태어나, 자연으로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갤러리신라 개인전 도록, 대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