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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이일,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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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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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가가 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논한다고 말한다면 어쩌면 앞뒤가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양식은 곧 사람"이라는 옛말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고, 그 뒤로 현대미술은 비인간화와 익명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니 작가의 작품에서 '인간'을 찾는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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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형근의 작품에 다가갈 때 나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런 접근은 반동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형근의 작품은 내게 '반동적'인 기품을 지니고 있고, 나는 그것이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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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윤형근은 '거인'으로 통한다. 우선 몸집이 아주 크고, 손도 발도 엄청나게 크다. 그러나 그의 '거인다움'은 단지 겉모습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마음도 크고 너그럽다. 어딘가 세상 밖에 사는 사람 같은 데가 있고, 몹시 고집스러운가 하면 때로는 나이에 비해 너무 천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고집은 아주 단순한 고집, 일종의 '이상주의적' 아집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한국 전통 선비의 고고한 정신이 얼마간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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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윤형근의 그림을 두고 '복고적 기품'이라는 표현을 썼다. 분명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 기품은 전통 선비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윤형근에게 '복고'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단순히 옛것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복고는 정신적인 것이다. 윤형근에게 복고란 우리 안에 있는 전통의 뿌리로 적극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조선 백자 같은 전통 도자기의 정취가 울리는 작품 속에서 그 뿌리의 '정신'을 새롭게 펼쳐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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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토기와 도자기, 목기에 대한 윤형근의 애착은 남다르다. 그는 이런 기물에서 투박한 '예스러움'(이론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아르카이즘')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섬세함을 알아본다. 그러나 이 '섬세함'은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섬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기교 없는 기교'를 말하는데, 그것은 결국 일종의 높은 정신적 집중, 하나의 '경지', 그 자체로 완전한 자연스러운 조화다. 그 조화야말로 한국 전통의 미의식, 한국만의 특별한 섬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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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조화와 특별한 섬세함을 어쩌면 한국 전통 공예의 '품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로 그 '품격'은 꾸며 낸 것도, 깊은 학식이나 정교한 기술의 결과도 아니다. 때로 그 '품격'은 아주 소박하고 천진한 것, '어떤 내면의 생명'이 넘쳐흐른 결과 저절로 우러나온 고귀한 삶의 한 형태다. 그것은 일종의 '우아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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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사람됨과 예술이 너그럽고 꾸밈없듯이 그의 그림도 그러하다. 그의 작품이 꾸밈없다고 할 때, 그 자연스러움이 그의 성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이 꾸밈없는 작품에 그대로 비친다는 뜻, 다시 말해 그의 취향과 기질이 화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대중에게 영합하려 하지 않듯이, 그의 '예술'도 무언가를 특별히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다만 드러낼 것을 묵묵히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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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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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은 1960년대 초 화가로 데뷔했다. 데뷔 당시 그는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였으니, 요즘 기준으로 보면 꽤 늦은 셈이다. 첫 개인전이 1966년에 열렸다는 사실은 그 늦은 인상을 더욱 짙게 한다(다만 윤형근의 경우 '늦음'은 그의 미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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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억이 다소 흐릿하지만, 그 초기 작품은 무거운 색조와 두꺼운 마티에르가 특징이었고 때로는 일종의 장식적 모티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면 전체가 빙글빙글 맴도는 듯했다. 이를테면 모네의 후기작 〈수련〉의 한 부분을 가까이 확대한 것과 아주 닮은 그림이 하나 기억난다. (그러나 윤형근의 초기 작품은 한 점도 찾을 수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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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이 윤형근의 초기의 시작인 것으로 보인다(작가 자신도 우리보다 더 확실히 알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윤형근의 창작적 방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이 초기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의 작업의 예술적 바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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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윤형근의 발전 단계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기는 매우 어려울지 모른다. 30년 가까운 그의 이력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을 뿐 아니라, 세월 속에서 여기저기 작은 기법상의 변화가 있었어도 그림의 정신적 바탕은 한결같았기 때문에, 그런 시기 구분은 인위적이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작업 전체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정신의 성숙에서 자라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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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기법이나 방식의 변화로 그의 작업을 시기 구분해야 한다면, 그의 이력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앞서 말했듯 변화의 속도는 느리다.) 여기에 한 가지 단서를 붙여 둔다. 이 시기 구분이 반드시 윤형근 작업의 직선적 발전의 이정표인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들 사이의 시기적 연결을 건너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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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초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그의 '모색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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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은 한국 추상미술 운동의 전환기였다. 한편으로는 '앵포르멜'의 표현주의적 추상 운동이 쇠퇴했고, 그 변화에 호응해 기하학적 추상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윤형근의 '모색기'가 이 무렵 끝났다는 사실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대의 흐름에 유난히 민감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대로 보면 '앵포르멜 세대'의 일원인 윤형근은 그저 자신의 '모색의 논리'를 따라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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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음부터 윤형근의 기질은 '기하학적'이지 않았다. 이 초기 작품이 '구조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기하학적이거나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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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작업의 구조는 대체로 수직적이었고, 화면 전체에 고르게 배치된 색 띠와 굵은 기둥의 골격으로 짜여 있었다(때로는 사선의 색 띠도 있었다). 그러나 색과 형태의 배치는 고르되 색 띠는 균일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란히 놓인 띠들이 마치 메아리가 울리는 공간처럼 함께 어우러졌다. 서로 맞닿기도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기도 한 '기둥'(색 띠)들의 색은 서로 얽히고 함께 스며들며 화면 위로 번져 그림 전체에 울림을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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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기에 일어난 변모, 그리고 윤형근 예술 이력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변화는 다음과 같은 문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초기 그림에서 보이던 공간의 울림이 얼마나 내면화되었는가. 둘째, 그 울림이 얼마나 본래적인 것인가. 셋째, 그 울림이 어느 정도까지 균질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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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1970년대 초 윤형근의 작업이 확실히 폭을 넓혔다는 점이다. 내가 '폭'이 넓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화면 전체의 구조와 색 띠가 넓어졌을 뿐 아니라 동시에 색 띠 자체의 너비도 달라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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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이 변모는 윤형근의 예술적 구상의 폭이 넓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정신의 폭도 넓어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색 띠는 차츰 '색면'으로 바뀌었다. 반면 그림의 구조적 요소는 점점 엷어졌다. 다시 말해 화면은 구조적 골격과 바탕으로 짜이던 이전의 평면에서 벗어나, 넓은 수직의 색면 몇 개가 화면 밖으로 번져 나가는 일종의 색면 회화가 되었다. 이렇게 캔버스에 스며드는 듯한 색면은 저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고, 그 공간이 더욱 본래적인 것이 되면서 윤형근 작업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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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번째 단계'가 언제 끝났는지 뚜렷이 짚기는 어렵지만, 앞뒤로 5년쯤의 차이를 두고 1970년대 말 무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짧은 이 시기에 윤형근의 예술 양식의 토대가 놓였고, 동시에 그의 본래적인 생명력과 긴장이 화면 위로 거세게 터져 나왔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더욱 말수가 적어졌고, 한편으로는 '여백'이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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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문헌화랑에서 윤형근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나는 전시 도록에 「여백으로서의 텍스처」라는 서문을 썼다. 인용이 다소 길지만, 내가 윤형근론이라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이 담겨 있기에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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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윤형근의 작품은 비록 지극히 막연하게 정의된 개념일지라도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분명 그 개념에 들어맞는다. '여백'이라는 개념은 흔히 본질적으로 동아시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윤형근의 작품을 어떤 동아시아적 개념 아래 묶으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윤형근의 경우 문제는 어떻게 전통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그 '미학'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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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백'을 의미 있게 하는 결정적인 존재는 '관계'라는 매개다. 윤형근의 그림에서 관계는 먼저 평면 위의 빈 공간과 색면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관계'는 색면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과 그 너머에 있는 공간 사이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대개 지금까지 윤형근의 작품은 완성된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윤형근의 그림은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기 밖에 있는 무한한 공간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화면 위의 여백과 색면의 관계에는 어느 쪽의 지배도 종속도 없다. 요컨대 색면이 여백 위에 놓여 빈 곳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색이 여백에 스며들어 둘이 서로 대위법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탕과 색면의 이원적 구조는 회복되고, 화면 전체는 비어 있음으로 '물든' 독특한 텍스처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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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윤형근은 이런 텍스처에 유난히 민감한 듯하다. 다시 말해 그는 캔버스 고유의 '살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에 맞추며,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살려 낸다. 이런 성향은 종이와 붓과 먹을 벗으로 여겼던 한국 전통 선비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기법적으로 윤형근은 꾸밈없는 인상과 붓질의 자연스러운 힘에 자신을 맡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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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연의 힘에 자신을 맡겼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렇게나 혹은 일방적으로 동아시아로 회귀했다는 뜻은 아니다. 윤형근의 예술적 표현은 새로운 추상회화, 다시 말해 '포스트미니멀' 시대의 추상회화를 실현한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표현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철수, 일종의 단색의 회복, 그리고 평면과 공간, 색면과 여백의 완전한 통합은 모두 새로운 가능성에 이르려는 예술적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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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에서 윤형근은 추상회화 자체에 대한 새로운 근본적 물음을 방법적으로 일관되게 표현함으로써 작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여기서 '방법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가 다른 화가의 어휘를 빌려 오지 않고 지극히 절제된 아주 개인적인 어휘를 통해 자신만의 말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 특히 드물다.) 이번 전시는 윤형근이 실로 그런 탐구를 해낼 수 있는 드문 작가라는 증거를 넉넉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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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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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작업의 '두 번째 단계'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여백으로서의 텍스처'라는 표현을 쓰고, 그 뜻을 대략 설명했다. 이 말로 나는 윤형근의 작품에서 색면과 여백이 단순히 '채워진 공간'과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둘 다 동질의 공간성을 지닌다는 생각을 나타내고자 했다. 바로 여기서 동양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윤형근 특유의 '여백의 미학'을 찾을 수 있고, 또한 여기서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구별되는 그의 방법론, 곧 화면 위에서 실현되는 일종의 '배제'의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배제'의 방법론은 '미니멀리즘 양식'의 일부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발상은 물론 다르다. 예컨대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형식 구상의 결과라면, 윤형근의 '배제'의 방법론은 형식적 구상을 넘어서는 직관의 세계에 속한다. 그의 색채 운용 또한 이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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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제'의 방법론의 출현, 그리고 그의 미학과 직관 세계 사이의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일체화가 윤형근의 '세 번째 시기'(1980년대)의 기본 성격을 이룬다. 물론 내가 말하는 '일체화'는 단지 양식이나 기법의 차원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세계관, 자연관과 관련된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윤형근의 범자연주의적 음양 사상, 곧 직관을 통해 실현된 그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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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회화의 세계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윤형근의 '두 번째 단계'를 거쳐 '세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밑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온 과정의 결과다. 다만 1970년대 후반의 작품에는 공간의 구조적 '분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컨대 화면의 양 가장자리에, 때로는 바로 한가운데에, 때로는 화면을 고르게 나누는 방식으로 여백을 빨아들이는 수직의 색면에서 구조적 요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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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들어서면 이러한 구조적 요소의 흔적은 화면에서 모두 사라진다. 화면을 수직으로 채우는 색면이 이따금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구조적 요소가 아니라 무한히 확장되는 일종의 '공간적 기능'이다. 요컨대 이 현상은 색면에서든 여백에서든 모든 구조적 요소의 '배제'를 뜻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화면 바깥으로 한없이 확장되는 일종의 실체적이고 무한한 공간적 현존이며, 이는 한정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현존이다. 그 현존이 가장 근원적인 모습의 '자연'이며, 우리 인간은 윤형근의 그림과 더불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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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로서의 이 실체적 '무한 공간', 이 공간적 현존을 만들어 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이 예술은, 나카하라 유스케의 표현을 빌리면 '침묵을 강요하는' 예술, 말하자면 '불가능의 회화'다. 그것은 화면에 거의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는 회화다. (나카하라는 1989년 4월 27일부터 6월 30일까지 히로시마, 오사카, 나고야에서 열린 윤형근 개인전 도록의 글에서 이 표현을 썼다.) 나카하라는 또 윤형근의 그림 속 '침묵'이 매우 강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어서 한 번 경험하면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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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메시지를 내 나름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잠재와 가능성의 세계의 제시, 곧 '불가능의 회화'를 통한 가장 근원적인 자연의 현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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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불가능의 회화'라는 말을 여러 번 썼는데, 사실 이 표현은 1986년 대구 인공갤러리와 서울 수화랑에서 열린 윤형근 전시 도록에 실린 내 글의 제목이었다. 1975년 문헌화랑 전시 이후 처음으로 그의 작품과 '대면'한 자리였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그의 작업 전체를 꿰뚫는 한결같은 정신적 바탕에 놀랐다. 다음은 그때 쓴 글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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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나는 책상 맞은편에 세워 둔 윤형근의 그림 한 점과 마주 노려보고 있다. 화면 왼쪽에 네모난 검은 면이 있고, 그 한쪽 가장자리로부터 짙은 엄버 색이 스며들어 있다. 면의 가장자리에서 조금 더 밝은 엄버 색이 번져 나오고, 화면의 나머지는 여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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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놓인 그림은 그것이 전부다. 꾸밈도 군더더기도 없다. 다만 거대한 바위처럼 자신의 공간을 장악하는 고요한 검은 면이 있을 뿐이다. 색으로 채워진 공간은 한쪽 면과 가운데 일부를 통해 또 다른 무한히 가로로 펼쳐진 여백과 맞닿아, 색면과 여백이 서로를 밀어붙인다. 다소 지나친 비유일지 모르나, 여백과 색면의 관계는 하늘과 땅, 음과 양의 관계와 같다. 음과 양 사이에 진정한 '경계'가 있을 수 없듯이, 윤형근의 그림에서도 여백과 색면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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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윤형근은 자연을 사랑한다. 그는 자연을 즐기며 꾸밈이 없다. 다소 투박하지만 '멋'을 아는 화가다. 우리 옛 토기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착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연에 대한 그의 소박하고 직관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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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에게 '자연'은 관념도 아니고 감각적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태', 근원적 실재를 그 안에 지닌 어떤 '상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구체적 현상이나 '창조'보다 앞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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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은 그 '상태'를 캔버스나 종이 위에 옮겨 놓고 있다. 그가 어떤 특정한 색에 싫증을 낼 때, 그것은 그 색을 넘어서는 근원적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한 색면 위에 칠하고 또 칠하는데, 마치 그 면이 스스로 한없이 자라날 것처럼 칠하는 것은 그 실재하는 존재를 화면에 붙들어 두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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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화할 수 없는 것에 형상을 부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무(無)를 붙잡아 항아리에 가두려는 것과 같다. 윤형근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해 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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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굵은 기둥 몇 개를 그리는 것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다. 이 기둥들은 이윽고 불어나는 듯 보였고, 때로는 서로 교차하거나 완만하게 휘어진 색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그 색면이 빈 공간, 곧 여백을 잠식하고, 둘은 때로 서로에게 스며들며, 마침내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자연스러운 '자연'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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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6일부터 12월 5일까지 인공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위의 서문을 쓴 전시로부터 3년 뒤에 열린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변화를 보게 될까. 지난 3년간 윤형근의 작품은 우주적 조화 속에서 색면과 여백, 유한과 무한, 채움과 비움 사이의 지속적인 동화를 보여 준다. 화면 한쪽을 물들인 '엄버-블루'가 마치 번져 나가듯 여백으로 스며든다. 내가 '우주적 조화'라고 한 것은 영원한 자연의 생성, 곧 채워진 공간과 비워진 공간이 음과 양처럼, 또는 색면과 여백처럼 '무한' 속에서 만나 생성에 참여하는 그런 생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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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의 작품이 참으로 영원한 생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영원한 미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무한을 향해 활짝 열린, 스스로 생성하는 살아 있는 세계다. 그의 작품은 삶 그 자체처럼 결코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자연은 그 가장 근원적인 모습에서 미완이며, 윤형근은 이를 이해하기에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연을 무한한 시간의 한순간에 붙들어 둔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윤형근이 참으로 '범자연주의' 작가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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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갤러리 개인전 도록, 서울, 1989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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