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의 회화
나카하라 유스케, 1989
윤형근의 그림에는 보는 이를 침묵하게 만드는 성격이 있다. 그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말은 그의 그림에서 더 멀리 달아나는 듯하다. 오히려 그림에서는 강한 메시지가 전해진다. 그 메시지는 너무나 강렬해서 한 번 그의 작품을 본 사람은 잊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사람을 수다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보는 이의 내면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작용을 한다.
1970년대 한국 회화에서 뚜렷해진 경향 가운데 하나는 모노크롬, 즉 절제된 색의 회화가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회화의 질감에 대한 높아진 감수성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경향은 특히 에꼴 드 서울 작가들의 작업에서 두드러졌다. 이를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윤형근의 회화도 이 경향 속에서 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색의 변화가 없거나 절제된 색이 이 작가의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윤형근은 화면의 질감에 대해서도 남다른 감수성을 보여 준다. 날캔버스에 직접 그리는 그의 기법은 바로 그 표시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형근의 회화는 앞서 말한 경향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뚜렷이 다른 점은, 캔버스에 물감을 올리는 방식과 질감에 대한 배려에 있어 비인위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저절로 형성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작가는 그 형성을 조금 거들었을 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이 인상이야말로 윤형근 회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작가는 엄버와 청색, 단 두 가지 색만을 쓴다. 이 두 색은 서로 겹쳐진다. 한때 나는 엄버가 땅의 색이고 청색이 바다나 하늘의 색이므로 윤형근이 이 색들로 자연을 상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지나치게 나 자신의 생각이었다고 느낀다. 두 색은 정확히 포개어 칠해지지 않고 실제로 그 사이에 틈이 있으며, 이 공간이 커다란 면을 만들어 낸다. 이 면은 마치 날캔버스를 천천히 잠식하며 그 위로 자라나는 것처럼 보인다. 면의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윤형근의 회화가 주는 인상은 끝없는 시간을 소모하며 퍼지고 깊어지는 힘 같은 것이다. 그 힘은 보는 이를 감싸 안으며, 입 밖으로 나온 말까지도 감싼다.
* 스즈카와 갤러리, 갤러리 휴마니떼, 갤러리 야마구치 순회 개인전 도록, 1989